면면이 이어온 애국의 혈통 '명재고택'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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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면이 이어온 애국의 혈통 '명재고택'을 찾아서
  • 박선희 기자
  • 승인 2021.05.17 22: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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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노성면에 자리한 명재고택
논산시 노성면에 자리한 명재고택

5월 15일 토요일.. 오늘은 논산에 있는 윤증 고가 명재 고택을 방문하기로 한 날이다. 명재 고택은 조선 숙종시대의 학자인 윤증(1629~1714)선생의 고택이다.

아침엔 비가 살살 뿌렸으나 논산으로 가는 동안 어느덧 비는 그치고 해가 반짝 나타났다.

나는 십여 년 전에 멋진 한옥을 구경 가자는 친구 따라 윤증 고택을 찾았던 적이 있다. 당시는 오로지 사진 찍기 좋은 장소만 보고 갔었는데, 이번 방문에서는 명재고택의 내력과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다.

파평 윤씨의 집성촌인 논산 노성면에 자리한 고택에 도착하자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그 큰 집에 대문이 없다는 것이다. 제주의 정낭을 연상시키는 작은 돌기둥만 있을 뿐이다.

누구나 편하게 들어올 수 있게 배려한 흔적이 보인다. 그 앞에서 명재 윤증의 종손 윤완식이 우리를 맞는다.

먼저 작은 도서관인 노서서재(魯西書齋)에 들어섰다. 책들로 둘러싸인 방 가운데는 테이블이 있어서 조용한 카페 같은 분위기다. 이곳에서 차분하게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고려시대 힘 있는 문벌 귀족으로 성장한 파평 윤씨는 조선시대에도 문과 급제자를 418명, 정승을 11명이나 배출한 큰 가문으로 성장하였는데,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에 터전을 잡으면서 충청 5현으로 불리는 윤선거와 소론의 영수인 윤증 같은 명현을 배출하였다고 한다.

윤증 선생은 53세에 벼슬이 내려왔으나 일할 수 있는 세 가지 조건이 아니면 벼슬하지 않겠다 하여 결국 벼슬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세 가지 조건은 첫째, 임금 집안 친인척을 배제하라는 것이고, 둘째 정치적으로 생긴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자는 것이고, 셋째 인재 등용 시 편가르기를 하지 말자는 것이었다고 한다.

윤증 선생은 일명 백의(白衣) 정승으로 불리운다. 일생 동안 벼슬길에 오르지 않으며 청빈한 선비로 추앙받은 까닭이다.

또, 조선시대에는 양잠(養蠶)이 중인들의 유일한 경제 수단이었으나, 먹고살 만한 윤씨 집안은 양잠을 하지 말라는 집안의 지시로 일제 강점기까지 양잠 사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중소기업의 살 길을 열어준 셈이다.

노서서재를 나와 기와를 얹은 사랑채 건물을 둘러보았는데, 기둥에 ‘이은시사’(離隱時舍)라 쓰여있는 현판이 걸려있다.

이 뜻은 ‘속세를 떠나 은거하면서 나아갈 때를 아는 집’이라고 한다. 옛 선비의 반듯한 기개를 느끼게 하였다. 종손 윤완식의 안내를 받아 사랑채 안으로 들어가 창문을 여니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경치가 눈에 들어온다.

종손인 윤완식은 이곳에 45년째 살고 있는데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어머님이 제일 먼저 시킨 일이 새벽마다 대문을 활짝 열어놓는 것이라 했다.

그 이유는 첫째는 남들보다 먹고살 만하지만 그들보다 부지런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요, 둘째는 형편이 어려운 사람은 그 누구든 열려있는 문으로 들어와서 일을 하고 쌀을 가져가라는 뜻이었다고 하니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큰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마당으로 나오니 끝없이 놓여있는 장독대가 장관을 이루고 있고, 그 뒤로 커다란 느티나무가 수령을 자랑하듯 위엄있게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명재고택(明齋故宅)의 고(故)는 옛 고(古)자를 사용하지 않고 연고 고(故)자를 썼는데, 그 이유는 윤증 선생이 돌아가시기 5년 전 이 집을 지었지만 선생님은 이곳에서 4km 떨어진 작은 초가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윤증 선생의 검소한 성격이 이런 이름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일행은 차에 올라 윤황 선생의 고택과 산소도 둘러보고 종학당으로 향했다.

종학당은 1625년 윤순거(파평윤씨 24세)가 세운 사설 교육기관이다. 초학과정의 종학당과 상급과정의 백록당 및 정수루를 지어 후학들을 양성하셨다 한다. 일제 강압에 의해 문을 닫기 전인 1910년까지 280여 년에 걸쳐 42명의 문과급제자와, 31명의 무과급제자, 그리고 수많은 생전과 및 석학을 배출하였다 한다.

과연 애국 혈통의 명문가라 아니할 수 없다.

북한은 체제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서 '백두혈통'에 대한 우상화와 선전을 계속해 오고 있다. 백두혈통에 대한 우상화와 선전은 김일성-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독재 3대에 대한 칭송을 넘어 김일성의 고조부인 김응우까지 들어가며 칭송하는데 칭송 내용에는 물증이 없거나 역사 자료가 없는 것으로 보아 사실인 것보다 허위와 날조가 많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곳 윤증 고택에는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역사적 자료와 후손들의 애국적인 업적들이 역사자료에 얼마든지 남아 있다.1636년 병자호란 당시 오랑캐와 싸운 문정공  윤황과 동생 윤전이 공을 세운 기록이 있다.

얼마전 퇴임한 윤석열 검찰총장도 이 가문의 핏줄을 이어받은 분이라 하니 ‘그러면 그렇지, 살아있는 권력에 그렇게 당당했던 행동은 애국 일념의 혈통이 아니면 있을 수 없지’하는 생각이 스쳤다.

장소를 옮겨 정수루에 올라서니 사각의 연못과 노성산 줄기 아래 자리한 병사 저수지가 시원하게 보이고 백록당과 종수루를 오가며 공부하던 옛 선현들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담장 뒤로 보이는 멋지게 뻗은 향나무가 말없이 지난 세월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오늘 파평윤씨 가문의 훌륭한 선조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라를 위한 애국심은 후학을 가르치고 어려운 백성들에게 보시(報施)하는 마음이 있을 때 우러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념과 탐욕에 사로잡혀 ‘잘못된 애국’의 길을 질주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애국은 이곳에 잠들어계신 어르신들처럼 반드시 의와, 평화와, 교육과 사랑이 함께 행하는 것이 진정한 애국이라 생각된다.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닫게 된 오늘, 돌아오는 길에 마음이 가벼운 것은 그 핏줄을 이어받은 분이 대권주자로 회자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종학당 정수루
종학당 정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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