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한고(梅經寒苦)
상태바
매경한고(梅經寒苦)
  • 장상현 인문학 교수
  • 승인 2022.07.21 07: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상현 인문학 교수
장상현 인문학 교수

제2편: 매경한고(梅經寒苦)

 

精金百鍊出紅爐(정금백년출홍로/ 좋은 쇠는 용광로에서 백번 단련된 뒤 나오고)

梅經寒苦發淸香(매경한고발청향/ 매화는 매서운 추위를 겪어야 맑은 향기를 내뿜고)

人逢艱難顯氣節(인봉간난현기질/ 사람은 어려움을 만나야 절개가 드러난다.)

 

위 내용은 사서오경(四書五經)중 공자(孔子)가 제일 우선적으로 가르쳐야할 과목으로 꼽는 시경(詩經)의 한 부분이다.

그 표현과 비유가 참으로 절묘하다.

짧은 한 구절로 인간의 가치 있는 행로를 잘 표현한 느낌이다.

인류가 문헌상 최고의 가치를 인정한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의 탄생은 참으로 엉뚱한 사건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무제(漢武帝)는 천한(天漢) 3년(서기전 98) 흉노(匈奴/북쪽 오랑캐)와 전쟁에 나섰다가 항복한 장군 이릉(李陵)을 옹호했다는 죄로 사마천을 궁형(宮刑)으로 몰고 갔다.

궁형은 부형(腐刑), 음형(陰刑), 극형(極刑)이라고도 불리는데 한나라 공안국(孔安國)이 “궁형은 음형淫刑인데, 남자는 거세하고 여자는 유폐幽閉하는 것으로 사형에 버금가는 형벌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어쩌면 사형보다 더 가혹한 형벌이었다. 

잠실(거세하는 장소)에서 거세당한 후 바람과 햇빛이 없는 곳에서 100일 동안 견디어 내야 목숨을 건질 수 있다는 매우 가혹한 형벌이다.

궁형을 선고받으면 사형을 자청할 정도로 치욕스러운 형벌이었으므로 사대부로서 이를 당하면 자결하는 것이 상례였다. 

대부분 사마천이 자결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는 사는 길을 택했다. 그가 죽음보다 치욕스러운 형벌을 견뎌내고 끝까지 살아남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서(漢書) 사마천열전(司馬遷列傳)에 실린 ‘임안에게 드리는 편지’, 또는 ‘임소경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불리는 유명한 편지에서 사마천의 심경을 엿볼 수 있다. 

사마천은 이 편지에서 자신의 처지에 대해 이렇게 한탄했다.

"마음이 상하는 고통보다 더 슬픈 것은 없고, 선조(先祖)를 욕되게 하는 것보다 더 더러운 행실은 없으며, 궁형(宮刑)을 받는 것보다 더 큰 부끄러움은 없습니다. 이 형(刑)을 받고 살아남은 사람의 수를 비교한 바는 없지만 한 세대만이 아니라 먼 옛날부터 그랬습니다.(漢書, 司馬遷列傳)
또 내가 죽는다고 해도 세상에서는 절개를 위해 죽은 자라고 하지 않을 것이며, 특히 슬기가 다하고 죄가 극에 달해서 면할 수 없기에 스스로 죽음으로 나아갔을 뿐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제가 세운 것들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사람은 진실로 한 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기러기 털보다 가벼우니 이는 그 추구하는 바에 따라 쓰인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漢書,司馬遷 列傳)

지금 자결하는 것은 혼자 도랑에서 목을 매어 죽는 자경구독(自經溝瀆)으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토로였다. 그런 죽음은 사마천에게 의미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자결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설명했다.

"저는 불행히도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어, 홀로 형제도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또 용기 있는 자라고 반드시 절개를 위해 죽지는 않으며, 비겁한 사내도 의(義)를 사모하면 어찌 힘을 쓰지 못하겠습니까?… 또한 노비나 비첩(婢妾)도 오히려 능히 자결할 수 있는데 하물며 저 같은 사람이 이를 얻지 못하겠습니까?"(漢書, 司馬遷列傳)

사마천은 귀한 신분으로 치욕스런 형벌을 당했지만 자결하지 않고 살아남은 많은 사람들의 사례를 알고 있었다. 주나라 서백(西伯/주문왕)은 백작이었지만 유리(牖里/감옥)에 갇혔고, 이사(李斯)는 재상이었지만 다섯 형벌을 다 당했고, 회음(淮陰/한신장군)은 왕이었지만 진(陳)나라에서 형장을 받았고, 팽월(彭越/장수)과 장오(張敖/장수)는 남쪽을 향해 고(孤/제후의 자칭)라고 자칭했지만 옥에 갇혀 죄를 받았고, 위기(魏其)는 대장이었지만 붉은 수의를 입고, 손발에 차꼬를 찼으며, 계포(季布)는 주가(朱家)에 의탁해 종이 되었고, 관부(灌夫)는 권세 있는 집안에서 욕을 당했다는 것이다. 사마천은 이들의 사례를 길게 나열하는 것으로 자신이 자결하지 않은 이유를 대신했다.
​그러나 귀한 신분으로 치욕을 받고도 살아남았다는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치욕을 견디고 살아남은 이유가 있어야 했다. 그렇지 못하면 치욕스런 삶에 대한 애착으로 귀결되는 것이었다. 

사마천은 “옛날에 부귀(富貴)했으면서도 이름이 사라진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오직 기개(氣槪)가 빼어나고 비상한 사람들이 칭송받았다.”면서 치욕을 견디고 업적을 남긴 사람들의 사례를 들었다.

“서백(西伯/주문왕)은 구속된 후 주역(周易)을 풀이했고, 중니(仲尼/공자)는 곤궁할 때 춘추(春秋)를 지었고, 굴원(屈原)은 쫓겨난 후 이소(離騷)를 지었고, 좌구명(左丘明)은 실명한 후에 국어(國語)를 지었고, 손빈(孫臏)는 발이 잘린 후 병법(兵法)을 닦았고, 여불위(呂不韋)는 촉(蜀)에 유배된 후 여람(呂覽)을 세상에 전했고, 한비(韓非)는 진(秦)나라에 갇힌 후 세난(說難), 고분(孤憤)을 지었습니다. 시경(詩經) 300편도 대저 성현(聖賢/공자)께서 발분(發憤)해서 지으신 것입니다.(한서 사마천열전)"

이들이 훗날 당나라 한유(韓愈)가 불평지론(不平之論), 또는 불평지명(不平之鳴)의 문학으로 높인 인물들이었다. 사마천은 이런 위인들이 남긴 업적에서 자신이 살아남아야 했던 이유를 찾았다.

“이 사람들은 모두 답답하고 맺힌 것이 있었지만 그 도가 통하지 못하자 지난 일을 서술해서 앞으로 올 사람들을 생각한 것입니다." (한서 사마천열전)

사마천도 후세에 할 말이 있어서 살아남았다는 것이었다. 가슴속에 드러내지 못한 것을 그대로 남기고 죽으면 그야말로 한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꾹 참으면서 구차하게 살려고 하고, 분토(糞土/감옥) 속에 갇혀서도 사양하지 않은 것은 제 마음속에 다하지 못한 바가 있는 것이 한(恨)이 되었고, 비루하게 죽으면 문채(文采)가 후세에 드러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한서 사마천열전)

그는 한(恨) 때문에 살아남았다는 말이다. 마음속에 다하지 못한 것을 풀어 내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한(恨) 때문에 죽지 못했음을 이르는 말이다. 그 한을 푸는 방법은 문채(文彩)를 후세에 전하는 길이었다. 사마천은 임안에게 보낸 편지를 이렇게 끝을 맺었다.
"죽을 날을 기다린 연후에야 옳고 그름이 판정될 것입니다. 글로써 제 뜻을 다 전할 수는 없지만 제 누추한 뜻을 대략 말씀드렸습니다. (한서, 사마천열전)"

 

우리나라 역사상 예명(藝名)을 남긴 이는 많지만 추사 김정희만큼 사람들에게 회자(膾炙)되는 이는 드물다.

그는 19세기를 대표하는 실학자이자 예술가로, 금석학(金石學)과 경학(經學), 시(詩), 서(書), 화(畵, 한묵(翰墨, 문한과 필묵이라는 뜻으로, 글을 짓거나 쓰는 것), 역사 등 문화, 예술, 사상계 전반에 걸쳐 새로운 지평을 연 인물이다.

추사에 대해서는 대부분 서예가 혹은 화가로서의 예술적 측면에서 많이 조명되는데, 이는 생전에 ‘평소 저술한 것을 스스로 나타내고 싶지 않아 문자를 남겨두고 싶지 않다’라고 생각하여, 체계적인 논고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예술 역시 실사구시의 학문관을 토대로 진리를 추구하여 민족문화의 정체성 확립에 힘을 기울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가 금석학, 경학 등에서 세운 업적은 조선의 역사학을 비롯해 사상계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김정희는 34세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세자시강원, 예문관검열, 성균관 대사성, 병조참판, 형조참판 등을 거치는 등 출세 가도를 달렸다. 특히 효명세자가 대리청정하던 시절 아버지 김노경(金魯敬)과 함께 세자의 측근으로 활동할 만큼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1840년에 제주도로 유배되면서 그의 인생에 암운이 끼기 시작했다. 1830년, 김노경이 윤상도(尹尙度)의 옥사를 배후 조종했다는 혐의로 고금도에 유배되었다가 순조(純祖)의 배려로 풀려나 복직한 일이 있었는데, 헌종(憲宗) 즉위 후 10년이나 지나 다시 이 일이 불거진 것이다.

그가 제주도에 위리안치(圍離安置/ 중죄인의 유배형으로 집 둘레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돌리고 그 안에 사람을 가둔다)의 외로운 귀양 생활 동안에 그는 평소 연마하던 글씨와 그림에 집중하였다.

그가 평생지기 권돈인(權敦仁)에게 쓴 편지 글속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남아있다.

‘내 글씨는 비록 말할 것도 못되지만 나는 일흔의 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붓 일 천 자루를 몽당으로 만들었다.’

모질고 혹독한 외로움을 서예(書藝)로 대성한 추사 그도 9년이라는 험난한 어려움이 없었더라면 평범한 정치가나 문장가로서의 명성이 있을 뿐 서예로의 명성은 없었을 수도 있었다.

 

중국의 사마천과 조선의 김정희! 생애 최대의 악조건 속에서 역사적인 최대의 역작을 남긴 표본이 되는 인물들이다

역사를 통해 훌륭한 영웅호걸들이 어려운 역경을 겪지 않은 사람이 없다.

대자연의 섭리와 창조주의 의지가 만물은 어려운 고초를 겪고 일어서는 자 만을 성공하게 만드는 것 아닌가?

夫天欲成就者 必先試艱險(부천욕성취자 필선시간험/ 하늘이 어떤 사람을 성취시키고자 할 때는 반드시 먼저 어려운 일을 주어 시험해 본다) 고려 문신 이규보의 말이다.

이 시대 쉽게 노력 없이 일확천금을 갈망하는 작은 꿈을 가진 현대인에게 주는 커다란 동력(動力)의 메시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