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얼굴 / 김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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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얼굴 / 김정아
  • 박선희 기자
  • 승인 2020.01.04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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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아 / 수필가
김정아 / 수필가

영속적으로 흘러가는 삶 속에서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얻거나 잃으며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곁에 머물던 누군가가 떠나면 적지 않은 상처로 남기 마련이다. 수많은 상실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영원한 이별일 것이다. 2009년 1월 초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세상에 홀로 내동댕이쳐진 듯 적막했다.

나락으로 한없이 추락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한몫했을 터이다. 충분히 슬퍼했어야 할 그 시점에 나는 담담하려 애썼다. 슬픔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 그래야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안간힘으로 버티던 자제력이 무너지더니 서서히 우울증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즈음에도 일상을 지탱하기 버거웠다. 밥을 먹다가도, 길을 가다가도, 잠들었다가 한밤중에 문득 깨어나서도 멍한 채 갈피를 잡지 못했다. 무기력해져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멍청히 베란다 밖을 내다보는 일이 잦았다.

 

'Good Grief'의 저자 웨스트 버그는 말한다.

상실을 경험한 사람이 슬픔에서 벗어나려면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갑작스러운 충격, 감정 표출, 우울, 외로움, 몸과 마음의 고통, 죄책감, 분노 등을 거쳐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이 슬픔의 감정이 아니라 스스로였음을 깨닫는 순간, 슬픔이 완성된다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현실 부정에서 시작하여 현실 인정에 이르는 심리변화 과정을 통해 비로소 회복에 이른다는 것이다.

 

슬픔에 갇히지 않으려는 생각은 반지빠른 계산일 뿐이었다. 살다 보면 원치 않는 일과 마주하게 될 것이고, 그 순간은 참담할 수밖에 없다. 그때 그 사실을 부정하거나 외면하지 말고 감정에 따른 시간을 거치면서 마음을 추슬러 서서히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눈물을 흘릴 이유가 분명했으므로 펑펑 울었어야 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최선이 아니라, 표현함으로써 고통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테니까. 사별 후라면 의당 몸과 마음이 아픈 것도, 눈물이 나는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 슬픔에 매몰되지 않겠다고 스스로를 다잡지 말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감정에 몸을 맡겼어야 했다.

살다 보면 언젠가는 필경 죽음과 마주칠 것이고, 그 순간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그때 그 사실을 부정하거나 외면하지 말고 충분히 애도의 기간을 거치면서 마음을 추스를 일이다. 애도의 시간이 너무 길어지거나 그 고통이 심하다면 아직 그 죽음을 인정하지 못했을 수도 있으므로.

팔개월여의 긴 우울증에서 놓여날 수 있었던 것은 그 해 초가을에 떠난 7박8일의 제주올레길 걷기와 줄글 덕이었다. 발가락 사이마다 물집이 잡히도록 걸었다. 제주 푸른 바다 위에 부서지는 빛살과 함께 어머니가 나타났다가 스러지기를 되풀이했다.

캄캄한 새벽에 집을 나서서 이슥한 밤에야 비린내를 풍기며 귀가하던 어머니, 삶의 장벽 앞에서 힘에 겨울 때면 애먼 딸자식에게 그 성정을 다 쏟아내던 어머니, 커서 절대로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내 어린 시절이 스쳐갔다.

여든의 고비를 향하던 연세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사나흘이 멀다하고 현해탄을 오갔다. 보따리무역으로 번 돈을 무능한 아들네의 생활비와 손주들 교육비로 쏟아 붓던 그녀, 그 모습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며 앙앙불락하던 나날들, 세상과 맞장이라도 뜰 것 같던 어머니가 폐암에 잠식당한 채 무너져 내리던 모습은 참담했다.

제주 올레길을 다녀와서 담담히 일상으로 돌아왔다. 돌아보면 그 당시 참혹했던 시간도 강물처럼 흘러서 멀고 아득해지기도 하고, 어느 순간은 가슴 한켠에 박혀 있다가 불현듯 가슴을 에이게 한다.

이제야 양적 인식과 더불어 질적 가치를 지닌 시간의 속성을 재음미할 나이임을 실감한다. 인생의 희로애락 속에서 '시간은 곧 삶'이라는 화두를 깊이 새기며 어느 한 순간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기를 희망한다. 야누스의 첫 달이 어느새 이울어가고 있다. 올 한해가 과연 어떤 얼굴로 내게 다가올 것인가. 마음이 자못 진지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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