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淸白吏)와 탐관오리(貪官汚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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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淸白吏)와 탐관오리(貪官汚吏)
  • 장상현 인문학 교수
  • 승인 2022.08.0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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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현 인문학 교수
장상현 인문학 교수

제3편: 청백리(淸白吏)와 탐관오리(貪官汚吏)

 

청백리(淸白吏)의 사전적 의미는 ‘청백(淸白)한 관리이다.’(동아 새 국어사전 4편/두산동아)라고 되어있으며, 조선시대 각 관아에서 천거(薦擧)하여 뽑힌 결백(潔白)한 관리를 이르던 말이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속담으로 ‘청백리 똥구멍은 송곳부리 같다.’ 곧 청백한 까닭으로 재물을 모으지 못하고 지극히 가난하다는 뜻이다.

청백리(淸白吏)는 직역하면 맑고 흰(淸白)것 같은 벼슬아치를 의미한다. 쉽게 말해서 절대로 부정부패와 권력형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관료나 정치인을 뜻하는 단어이다.

염근리(廉謹吏)라고도 하는 청백리는 청직(淸直)으로 관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품행이 단정(端正)하고 순결(純潔)하며, 자기 일신은 물론 가내(家內)까지도 청백하여 오천(汚賤)에 조종되지 않는 정신을 가진 관리를 가리킨다.

청백리 정신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청렴정신은 탐욕(貪慾)의 억제(抑制), 매명행위(賣名行爲)의 금지, 성품(性品)의 온화성(溫和性) 등을 내포하고 있다.

바로 이 청백리 정신이야말로 선비사상과 함께 백의민족의 예의(禮儀)국가관에 의한 전통적 민족정신이며, 이상적인 관료상(官僚像)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 민족정신은 단군 이래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윤리관에 그 바탕을 두고 형성되어 삼국시대에는 화랑정신(花郞精神)으로,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외침(外侵)에 의한 구국항쟁(救國抗爭), 그 후로 의병활동(義兵活動)으로 계승·발전하여 국가의 참된 가치를 일깨우는 정신으로 승화하고, 불굴의 투지로 국가 발전을 위한 에너지의 원동력으로 작용하면서 오늘에 대한민국의 공익을 떠받들고 있다.

안타깝게도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는 청백리라는 용어를 기록에서 볼 수 없는 것이 아쉽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시대에도 공직자는 있었고 그 시대를 대표했던 공직의 표상이 되는 인물이 있었을 것이다.

다행인 것은 청백리 제도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선정을 위해 청렴결백한 관리를 양성하고 장려할 목적으로 제도화하여 발전시켜왔고, 기록에 의하면 218명이 청백리로 선정되어 후대에 모범이 되고 공직자의 표상으로 추앙되어 지금까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조선시대 목민관(牧民官/ 고을 수령)들에게는  4가지는 해서는 안 되고,  3가지는 거절해야 하는 불문율(不問律)이 있었다. 이른바 사불삼거(四不三拒)이다.

이에 사불(四不)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할 4가지로서 첫째 재임 간 부업(副業)을 하지 말 것, 둘째 땅을 사지 않을 것, 셋째 집을 늘리지 않을 것, 넷째 부임지(赴任地)의 명산물(名産物)을 먹지 않을 것.

삼거(三拒)로는 꼭 거절해야 할 3가지로 첫째 윗사람의 부당한 요구 거절, 둘째 청(請)을 들어준 것에 대한 답례 거절, 셋째 자신의 경조사(慶弔事) 부조(扶助)를 거절하는 것이다

인간의 타고난 욕구를 가지고는 지키기 힘든 규칙이다. 그러나 그 시대에 청렴하고 품격이 높았던 선비들은 사불삼거를 즐거운 마음으로 잘 지키므로 백성들이 편안하게 생활하도록 잘 다스림은 물론 후대에 길이 남는 큰 족적을 남겼던 것이다.

 

조선시대 한 청백리의 사례를 소개해본다.

성종 시대에 과거에 급제한 윤석보(尹碩輔)는 연산군 11년에 풍기(豊基)군수로 임명을 받고 남녀(男女) 하인 한 명씩만 데리고 부임하자 본집에 남은 처자의 생활은 곤궁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부인이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비단 옷을 팔아서 밭농사라고 짓겠다며 땅 30평을 사들였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 대경실색하고 편지를 써서 꾸짖고 산 땅을 되돌려 주도록 하였다. 그는 아무리 생활고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백성들로부터 땅을 사들이는 행위는 국록을 받는 공직자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청송부사 정붕(鄭鵬/1467~1512)은 1486년(성종 17) 진사가 되고, 1492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그가 청송부사로 재임 시 당시 영의정이 “잣과 꿀을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그는 “잣나무는 높은 산에 있고, 꿀은 민가 벌통 속에 있습니다.”라고 하며 영의정 청을 거절하였다.

목민심서(牧民心書)에 ‘청렴이라고 하는 것은 목민관의 본무요 모든 선(善)의 근원이다.(廉者牧之本務 萬善之源/ 염자목지본무 만선지원)라고 했다.

한편 탐관오리(貪官汚吏)는 탐욕이 많고, 행실이 깨끗하지 못한 관리라고 기록되어 있다.(동아 새 국어사전 4편)

탐관(貪官)이란 감사(監司)나 현감(縣監), 현령(縣令) 등 지방관을 의미하며 오리(汚吏)란 아전(衙前)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의 탐학과 횡포는 토호들의 만행과는 그 질이 달라 힘없는 백성들을 직접 상대하여 고혈을 짜내는 것이다.

특히 아전들의 만행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해 국정운영에 장애를 초래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아전이란 본시 지방관아에서 사무를 관장하는 이서(吏胥/ 하급관리)로서 사회적 계급은 중인(中人)이거나 상민(보통 백성)의 대우를 받으면서 급료는 전혀 받지 못하고 역직(役職)에만 종사하는 무리이다.

그 아전들은 거의 모두가 그 지방의 토착민 출신이며 세습적으로 그 임무를 계승함으로써 행정 실무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기술자요 무시할 수 없는 전문가이기도 했다. 결국 관아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부상했지만, 나라에서 그들에게 급료(給料)를 지급하지 않았으니 백성들의 재물을 강탈하여도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묵인보다는 오히려 비호해야 할 형편일 때도 있었다. 아무튼 아전들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고 백성들은 자연히 현감이나 군수보다 아전을 더 무서워하기에 이르렀다.

납세나 환곡(還穀), 부역(賦役)에 걸쳐 아전의 협잡(挾雜), 농간(弄奸), 착취(搾取), 약탈(掠奪)은 지방행정 전반을 문란케 하고 민심을 불안케 하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지방관들은 이러한 아전들에게 제재를 가할 수가 없었으니 오죽하면 강류석부전(江流石不轉/ 수령이나 방백은 강물처럼 흘러오고 흘러가지만 오직 아전들만은 돌처럼 확고부동하여 움직이지 않는다.)이라는 속어까지 유행하게 되었겠는가?

탐관오리의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고부군수(古阜郡守) 조병갑(趙秉甲)과 경상우도병마절도사 백낙신(白樂莘)을 꼽을 수 있다.

우선 고부군수 조병갑의 착취 내용을 요약해 본다. 그의 본명은 병갑(秉甲), 字는요성(耀成)이고 본(本)은 양주(楊州)로 당시 영의정 조두순의 서질(庶姪)이었다.

그는 1863(철종14)관직에 올라 여러 주군(州郡)의 수령을 거쳐 1892(고종 29) 전라도 고부(高阜) 군수(郡守)가 되었는데 그의 비행(非行)은 아래와 같다.

1. 부민(富民)을 잡아들여 不孝, 不睦, 淫行 등의 죄명으로 2만여 냥 재물을 갈취

2. 태인 현감을 지낸 아버지의 공덕비(功德碑) 건립비로 1000여 냥 수탈

3. 농민에게 면세를 약속, 황무지 개간 허가 후 추수기 강제 세금 징수

4. 대동미를 쌀 대신 돈으로 거두고  질 나쁜 쌀로 바꾸어 중앙에 상납 후 차액 착복

5. 세곡(稅穀) 운송선(轉運所)에서 추가로 쌀 강징(强徵)부족한 쌀 명목으로 추가 거출

6. 부역으로 만석보(萬石洑)에 신석보(新石洑)설치 후 수세 1마지기당 두말씩 거두어 700석 사취

7. 모친상에 부조금으로 2000냥을 거두어 오도록 지시

결국 이들의 착취로 민중봉기가 일어나 동학혁명으로 확대되는 일의 시발이 되었다.

 

또 다른 탐관오리 백낙신(白樂莘)의 예를 보자

그는 아버지 박형수(水軍僉節制使)와 전주 이씨(母)사이에서 태어났다.

1858년 전라좌수사에 임명(44세)되어 임무수행을 하다가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로 체직되어 진주성(晉州城)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가 착취한 내역은 아래와 같다.

1. 신유년 겨울 환곡 때 고가로 취잉(取剩)한 것 1,400냥

2. 병고전(兵庫錢)을 반이(搬移)할 때 돈 3800냥, 곡식 1066석 징수 횡령

3. 추봉(秋捧) 때 한 섬에 5냥 5전 씩 합계 6966냥을 징수 횡령

4. 입본취잉(立本取剩)으로 3166냥 착복

5. 모색낙가전(耗色落價錢)으로 1465냥 착복

6. 농민들이 개간 경작한 지 이미 오래된 청천교장(靑川敎場)의 전지(田地)를  공갈 거두어들인 돈이 2000냥

7. 백성들이 범금(犯禁), 채광(採鑛)을 구실삼아 강제징수 2000냥

이 밖에도 사소한 수탈을 일일이 입에 담지 못할 지경이다. 이로 인하여 주농민봉기(晉州農民蜂起)로 조선 역사상 최초의 민란으로 기록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시 목민심서(牧民心書)봉공육조(奉公六條) 수법(守法)의 한 구절을 새겨본다.

이익 됨에 유혹되지 않고, 위세에 굴하지 않는 것이 수령의 도리이다. 상사가 독촉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을 줄 알아야 한다.(不爲利誘 不爲利屈 守之道也 雖上司督之 有所不受/ 불위리유 불위리굴 수지도야 수상사독지 유소불수)

이 시대 청백리 정신은 이어가고 공직자는 엄격한 신상필벌(信賞必罰)로 다스려 선조들의 고귀한 전통을 아름답게 이어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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