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노인들은 대체 어디에 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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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노인들은 대체 어디에 가 있는가
  • 임준수 전 중앙일보 편집부국장
  • 승인 2022.03.12 07: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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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준수 전 중앙일보 편집부국장
임준수 전 중앙일보 편집부국장

* Yesterday was one of the happiest days of my life.

팔자에 없는 5성 호텔의 호사를 누렸다. 두 친지의 휴일(대통령 선거일) 나들이에 꼼사리를 낀 것이다. 무임승차, 무전 취식, 무료 숙박 등 3무의 공짜 혜택이 주어진 호화판 여로였다. 최상급 100% 경로 혜택이란 바로 이런 경우일 것이다.

투숙한 호텔은 동해안의 명소 정동진에 자리 잡은 '썬 크루즈(Sun Cruise)'라는 복합 리조트 안에 있었다. 상아빛 호텔 건물은 두 개의 거대한 크루즈선이 해안 숲 위에 떠있는 형상이다. 정문에서 로비의 회전문으로 통하는 긴 보행로의 양쪽에는 비너스를 본 뜬 여인상들이 내방객을 사열하듯 서 있다.

여인상들은 모두 관능미가 철철 넘친다. 한결같이 노출된 가슴을 부각시켜 동행한 은퇴 목사님이 시선 둘 곳을 몰라 당혹해 할 정도다. 아~ 여기가 바로 미국 CNN방송이 "죽기 전에 한번 묵어봐야 할 세계의 호텔 100선"중의 한곳으로 뽑은 곳이란 말인가. 중증으로 심약한 남자라면 로비까지 가기 전에 심장마비로 죽을 판이다.

거두절미하고---.

스카이라운지나 부페장에 가보니 좀 과장해서 사람들이 바글바글한다. 아무리 둘러봐도 노친네는 나 혼자뿐이고 대부분 20~30대들이다.

"월급 만으로 이런 크루즈 호텔에 묵을 수 있겠나.

이놈들이 부모님을 이런 곳에 한 번이라도 모셔봤겠나.

그런데 투표는 하고 왔을까"

온갖 꼰대같은 의문을 품는 중에 불현듯 떠오른 것은 35년 전 유럽 출장 중에 겪었던 1박2일의 크루즈 체험이었다.

스톡홀름에서 헬싱키로 가는 발틱해 여로였다. 최하층 3등칸 선객이었던 나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인 17층 버튼을 눌렀다. 이어 열린 문을 나와 카펫 통로를 따라 무작정 들어간 곳은 현란한 연회장이었다. 내가 이때 놀란 것은 이 호사스런 스카이라운지의 이용객들이 대부분 노인들이었다는 점이다.

오늘의 번영을 이끈 우리네 노인들은 대체 어디에 가 있는가. 모르긴 해도 집에서 손주를 보거나 파고다 공원에 가서 장기나 두는 경우가 태반일 것이다. 운이 좋으면 시설 좋은 보호소나 요양기관에 위탁되어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거나.

분수에 넘치는 호강을 한 이날, 또 다른 기쁜 일이 겹쳤다. 내가 투표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그러나 상대적인 즐거움이었던 게 아쉽다. 나를 호강시켜준 두 경로사상가(?)들이 좋아하는 후보가 낙선을 했기 때문이다. 5년 뒤 또 투표할 기회가 생기면 이들과 같은 후보를 찍어 신세 갚음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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