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혁아, 지은아, 우리 역사를 바로 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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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혁아, 지은아, 우리 역사를 바로 알자
  • 김용복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3.13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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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복 칼럼니스트
김용복 칼럼니스트

지혁이와 지은이를 비롯해 할아버지 손자 손녀들은 듣거라.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이 하와이 진주만의 미국 해군 기지를 기습 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일본군의 폭격으로 미군은 수많은 함정과 비행기가 파괴되고 2,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일본군은 뒤이어 필리핀의 미국 공군 기지와 홍콩의 영국 공군 기지에도 폭격을 가했다.

일본은 미국이 일본의 인도차이나 침공을 이유로 미국 내 일본 자산을 동결하고 석유 수출을 금지하자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추축국 동맹을 맺고 있었기에 미국 의회는 곧바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을 결의했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아시아와 태평양으로 확대됐다.

1945년 2월, 당시 할아버지 나이 다섯 살.

태평양 전선의 미군은 필리핀을 탈환하고 이오섬에 상륙했다. 이오섬은 사이판섬의 기존 비행장보다 일본과 더 가까워 본토 공습에 필수적인 전략적 거점이었다. 고작 20제곱 킬로미터의 작은 섬이었지만 일본군의 집요한 저항으로 미군이 함락하는 데는 한 달의 시간이 걸렸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 2만 명이 거의 전멸하고 미군 6,000명이 희생됐다. 4월에 시작된 오키나와 전투는 무려 3개월이 소요됐다.

결국 미국 정부는 일본 본토를 직접 침공하는 것보다 더 적은 희생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원자폭탄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돼 즉시 7만 명이 죽고 7만 명이 부상했으며, 9일 나가사키에 떨어진 두 번째 폭탄으로 4만 명이 죽고 4만 명이 부상했다. 설상가상으로 8월 8일 소련마저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자, 14일 일본 정부는 천황의 지위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연합국에 항복을 선언했다. 이로써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나라가 참여하고 가장 많은 인명을 앗아간 최악의 전쟁이 막을 내렸던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역시 할아버지 나이 다섯 살.

우리나라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해방되었던 것이다. 이때 미국이 일본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가 없었다면 우리나라 한반도는 아직도 일제 통치하에 살고 있을 것이다. 일본이 어떤 인간들인지 역사를 통해 그 인간성들을 알 것이다.

일제 식민지 시절에는 보수, 좌익, 진보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나라의 독립을 위해 고귀한 생명 바치며 얼마나 많은 투쟁을 하였던가! 해방 전까지 남 북한이 분단되기 전까지, 같은 국기를 사용하고, 같은 애국가를 부르며 살았던 민족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남한은 해방되기 전 사용했던 국기, 애국가를 현재까지도 사용하며 자유민주의를 소중하게 여기는 반면, 김일성이 이끄는 북한은 다른 인공기, 국가(國歌)를 만들어 사용하며, 같은 민족으로 함께하지 못하는 대물림 정치, 반역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를 확실히 하자는 것이다.

북한 공산주의자나, 남한의 공산주의 사상, 이념에 가까운 사람 모두가 미국 때문에 우리나라 가 해방된 것은 확실하다. 한반도 역사가 이어지는 동안은 미국에 감사하고 고맙게 생각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 고마움을 모르고 산다면 배은망덕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자주국가로써 힘이 약했기에 북한에는 소련군이, 남한에는 미군이 남아서 자주국가로써 힘을 기를 때까지 신탁통치를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보라. 남한에 있는 박헌영이를 비롯한 빨갱이들이 신탁통치를 결사반대하며 그들이 주동이 되어 민심을 선동하고, 그 세력의 힘으로 남한에 주둔해 있던 미군을 몽둥이를 휘둘러 가며 내쫓았던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1950년 6월 25일. 할아버지 나이 열한 살

북한 김일성이는 미군이 쫓겨난 틈을 이용해 소련의 도움을 받아 소련제 탱크를 몰고 남한을 쳐들어오기에 이른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이 응할 리 만무했다. 언제는 몽둥이 들어 쫓아내고, 이제 와서 도와달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거절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외교에 능했다. “만일 도와주지 않으면 아직도 한국에 남아있는 미국 선교사와 그 가족, 그리고 사업차 한국에 온 사람들이 모두 죽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승만의 설득 외교에 할 수 없이 일본으로 쫓겨났던 미군이 한국전쟁에 합류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지혁아, 해방 후 골수 빨갱이 이야기로 돌아가자.

박헌영의 얘기다. 박헌영이는 지주들의 땅을 몰수해서 지주 아닌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겠다고 선동해서 당시 전국 남로당 가입률이 78%나 되었다. 땅을 공짜로 주겠다는데 유혹에 안 넘어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박헌영의 농민들을 선동하며, 간첩 매수 비용을 만들어 대던 자가 박낙종이다. 그는 위조지폐를 만드는 최고의 실력자. 박낙종은 현재 국정원장 개눈깔 박지원의 친할아버지인 것이다. 아니면 박지원은 필자를 고발하기 바란다. 법정에서 싸워보자.

박지원은 전라도 사람들 마저 국회의원 선거에서 버린 인간이다. 그런 인간을 문재인이 누구(북한?)의 지시를 받았는지 데려다 국정원장에 앉혔던 것이다.

박헌영이가 위폐로 간첩들을 매수하고 전국에 남로당 조직을 완성하다 걸려 체포 직전에 북한으로 도망가고, 박헌영의 아들은 현재 한국에 살고 있는데, 그놈의 아들 이름이 원경 스님이다.

이 간첩 중놈의 머리가 천재급, 절을 차려 돈을 모아 "역사 문제연구소"라는 단체를 만들어 한국의 근현대사를 완전 종북 좌편향으로 왜곡 출간, 원경 중놈 간첩과 함께 역사 문제연구소에서 맹활약한 또 한 놈이 바로 비서를 성폭행하고 들통나자 자살(?)한 서울시장했던 박원순이었던 것이다.

역사 문제연구소에서 역사 왜곡하던 놈들인 한홍구, 이학영 등 역사문제연구소 인사들이 중고교 검인정교과서 집필진이 되면서 역사 교과서가 종북 좌편향 되었던 것을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 교과서로 다시 바로잡아 새로 만들었던 것이다.

역사 문제연구소의 이학영은 이후 종북좌파 공작금을 마련하려고 동아건설 최원석 회장집에 들어가 강도짓을 하다가 뒤늦게 꼬리가 잡혀서 감옥에 갔는데, 이것이 남민전 사건인 것이다.

그리고 이학영이의 뒷바라지를 하고 출소 후에 선거자금을 대서 국회의원이 되게 한 자가 바로 문재인이었던 것이다.

그 시절 노무현이 집권하자마자 남민전 사건을 민주화운동이라고 판결을 뒤집음에 따라 이학영이는 이 기회에 배상금으로 수십억을 챙겼던 것이다.

그래서 전교조에게 교육을 받아 역사를 바로 알지 못하는 내 손자 손녀들, 그리고 새로 태어나는 증손자와 손녀들, 이어지는 내 후손들만이라도 바로 알게 하려고 이 늙은 할아버지가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고 있는 것이다.

내 외종사촌들이나 조카들도 이 사실을 바로 알아야 나라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박헌영이가 지주의 농토를 빼앗아 농민들에게 공짜로 나누어주겠다는 말에 속아 남로당에 가입한 농민들이 78%나 된 것은 알겠으나, 코로나19의 재난지원금을 공짜로 주겠다 하여 이에 현혹된 국민들이 이재명에게 표를 준 사람들이 얼마인지 할아버지는 모른다.

그러니 공짜에 현혹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뒤에는 남모르는 검은 손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 소고기 먹으면 광우병 걸린다고 유모차 500대까지 동원했던 그들인 것이다.

사랑하는 손자 지혁아, 지은아.

그리고 지연이, 성준이, 성민이, 하은이와 하영아, 우리 외증손녀 4살 박이 시아야.

이 할아버지 말을 가슴 깊이 새겨 우리 역사를 바로 알고 빨갱이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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