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왜 외로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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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왜 외로운가
  • 정 온 교사
  • 승인 2022.08.01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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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온 교사
정 온 교사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웃으면서 달려보자 푸른 들을
푸른 하늘 바라보며 노래하자
내 이름은 내 이름은 내 이름은 캔디
     -들장미 소녀 <캔디>-

전 인류의 보편적 감정이 있다면 그건 바로 "외로움 "일 것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 학창시절을 보낸 많은 이들은 가수<혜은이>의 달달한 이 노래를 잘 알고 있다. 운동회 때 단골 노래 중 하나였으며 전화 컬러링으로도 인기가 많았던 곡이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우산도 없이 빗속을 걸었던 적도 참 많았다. 그날은 많이 외로웠던 날이고 눈물과 빗물은 구별되지 않기 때문에 떳떳이 울 수 있었던 날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외로울 때 이 노래를 부르면 더 외로워진다.

문명이 발달해도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외로움의 두 유형은 사회적 외로움(social loneliness)과 감정적 외로움(emotional loneliness)이다. 이 두 가지는 함께 공존하기도 한다. 혼술 혼밥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 미혼, 이혼, 사별 수명의 연장이 외로움을 더욱 가증 시켰다. 인간의 외로움은 이제 숙명이 되어 버렸다. 외로움을 피하기 위해 매일 타인이나 술에 의존하기도 하고 약의 힘을 빌리기도 한다. 외로움의 원인은 혼자일 때도 있지만 사람 속에 있을 때도 있다는 사실에 난 또 좌절했다.

사막에서는 조금 외로워
그런데 사람들 속에서도
외롭기는 마찬가지야.
      <어린왕자>

인간은 외롭기 때문에 사랑하고, 외롭기 때문에 배반을 느끼고, 외롭기 때문에 헤어지고, 외롭기 때문에 또 사랑한다. 도대체 인류 최고의 이 고질병은 어디서 온 것일까?

He who is unable to live in society ,or who has no need because he is sufficent for himself ,must  be either a beast or a god.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없거나 혼자라도 부족한 게 없어서 굳이 사람들과 어울려 살 필요가 없는 이는 짐승 아니면 신이다.) <아리스토 텔레스>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자 위대한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도 외로움을 느꼈다. 2천 년 전에도 외로움은 큰 병이었나 보다. 세기의 지성도 외로움을 느꼈다는 말에 난 눈물을 훔쳤다.

내 외로움의 시작은 어디였을까? 최초의 외로움을 뼈저리게 느낀 결정의 그날은 바로 삼대 독자인 내 남동생의 탄신일이었다. 부모님은 결혼 후 3년 넘게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이 굿이라도 해야한다는 둥 부적이라도 사야 하지  않겠냐는 둥 다산한 여자의 속옷이라도 훔쳐다 입어야 하지 않겠냐! 하던 그 시점에 나를 낳으셨다. 딸일지라도 온갖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런데 갑자기 남동생이란 우주에서  데려온듯한 머리통 큰 괴물이 내 앞에 나타났다. 2년 만의 내 모든 권좌는 사라졌다. 두꺼비처럼 생긴 이 낯선 생물에게 모든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외할머니 친할머니 두 분 다 곱게 한복을 차려 입으시고 금비녀를 꽂으시고 직접 만드신 한과랑 묵 떡 말린 과일 등등 온갖 선물을 들고 남동생을 영접하러 오셨다.

동네 어르신들께서도 그 녀석 고추 한 번 보자며 오는대로 두꺼비의 아랫도리를 사정없이 벗기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연신 "고녀석 고추 참 예쁘네, 잘생겼네" 하시길래 슬쩍 훔쳐봤다. 녀석의 요망하게 생긴 물건은 갑자기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어린 난 처음으로 외로움을 느꼈다. 심지어 그 녀석은 기저귀를 벗기는 순간에도 팬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고래처럼 물쇼를 하기도 했다.

어른들이 음식을 준비하시는 동안 하늘이 주신 기회를 놓칠세라, 이방인의 아랫도리 물건을 손톱으로 꼬집었다. 하필 그 녀석 물건의 표피가 손톱에 파고들었다. 이 요망한 녀석이 내 손톱 박피를 당하는 그 순간, 싸이렌 소리를 울렸다. 모든 어르신들께서 갑자기 달려오셨다. 아야! 엄마는 내 등짝에 스매싱을 날렸다. 어르신들은 '에구구  우짤꼬'를 반복하셨다. 난 순식간에 삼대 독자의 고추를 포경한 죄가 얼마나 큰지를 깨닫고 외할머니의 치마자락 뒤로 빠르게 피신, 스스로 외갓집으로 가겠다고 귀향길을 선택했다. 백의종군하던 그날 엄마는 진짜 외갓집에 갈 거냐고 여러 번 물었다. 난 장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나이 세 살, 성종의 부인으로 투기, 질투, 부도덕한 행위와 용안에 손톱자국을 내서 친정으로 쫓겨간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 씨의 서러움을 깨달았다. 난 외로움의 영재임에 틀림없다. 아마도 외로움의 등급을 테스트하는 시험이 있다면 난 별표 다섯 개 정도는 능히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의 지진도를 측정할 수 있다면 P파 S파 중 R파 L파 중 무엇일까? 내 외로움의 진앙지는 어디일까? 전두엽, 후두엽, 측두엽? 숟가락으로 외로움을 타는 부위를 뚝 덜어내고 싶을 때가 너무 많다. 이제 그만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진심 그만 외롭고 싶다.

내 외로움의 메카는 자자손손 양반가로 널리 알려진 "안동 하회(安東 河回)마을"이다. 2010년 7월 31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의 제34차 회의에서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확정된 바로 그곳이다. 양반가의 상징 하회마을이다.

하회(河回)란 뜻은 물이 마을을 감싸고돈다는 뜻이다. 외로움은 그렇게 내 마음을 감싸고 회돌았다. 외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마을로 입성했다. 갓 쩌낸 찐빵처럼 뽀샤시하고 귀염뽀짝 여자 아이의 출현은 온 동네를 즐겁게 만들었다. 하지만, 난 너무 외로웠다. 동네에서 가장 높으신 어르신께서 가끔씩 곶감을 하사하곤 하셨다. 동네 사람들의 관심이 커질수록 더 외로웠다. 난 외로움과 함께 어떻게든 이 동네서 칭찬받는 아이가 되려고 점점 영악해져야만 했다.

지금 내 고향 하회마을은 뜻밖의 강적의 출현으로 유명세를 타고있다. 바로 엘리자 베스 여왕이다. 그녀의 신발을 벗게 한 곳으로 유명세를 타고 수많은 관광객으로 매일 북적거리고 있다. 내 유년의 기억속 고즈넉한 마을은 이제 영원히 사라지고 유명 관광지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내 외로움은 내게 숙주처럼 빌붙어서 연가시처럼 날 조정하기 시작 했다.

외로움!

이것을 극복하는 그 순간 최고의 경지에 달하기도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의 경지도 어찌보면 외로움과 싸워 이겨냈을 때의 순간을 말하는 걸지도 모른다. 예술가나 발명가나 철학자들도 이 질병과 싸워왔으며 예수도, 마호메트도, 붓다도 외로움의 최고 경지를 향해 스스로 몸을 던졌다.

요즘 꾸안꾸(꾸민 듯 안꾸민 듯)란 말이 유행이다. 내가 생각하는 요즘 삶은 사안사(사는 듯 안사는 듯)이다. 다들 인스타그램이나 카톡보면 현란하고 행복해 보이지만 막상 전화하면 "요즘 나 외로워"란 말이 대부분이다.

삶은 무엇일까? 삶은 신뢰할 것이 못된다. 분명 공평하지도 않다. 외로움의 크기도 돈, 명성, 권력, 그 어떤 것과도 관련이 없다. 어떤 이에겐 뇌를 계속 갈고리로 긁어대는 것, 마음이 원귀처럼 한이 맺혀 정신이 계속 떠돌게 만드는 것이 바로 외로움이다. 그러나 어떤 이에겐 가슴에 달고 있는 별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유명 정치인이나 연예인 그룹 회장님이 지하도에 누워있는 홈리스보다 더 외로울 수 도 있다. 이 정체 불명의 괴물은 지위를 막론하고 파고든다.

신이 나를 계약직으로 이 세상에 고용했지만 난, 여왕처럼 위엄을 잃지 않을 것이다. 나만의 왕국에서 어떠한 외로움에도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우주에 버려진 쓰레기처럼 외롭고 힘들었다. 난 누구일까?
삶의 모범답안은 어디에 있을까? 현세의 삶이 비루하고 초라할지라도 여왕의 위엄을 지키고 살겠다. 나만의 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초인은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왜 외로울까? 우리 모두는 유전자 속에 외로움을 타고난다. 외로움이야말로 생존 본능에 들어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외로움을 느낌으로 우리는 함께함을 배웠고 서로의 소중함도 알게 되었으며 함께할 수 있으므로 지구상에서 왕좌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감히 말한다. '외로움이야말로 우리의 최고의 무기'라고.

T-Rex의 톱날 모양의 이빨도, 검치호랑이의 날카로운 발톱도, 멸종을 막지는 못했다. 인간이 강한 건 외로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지상에 혼자 남겨진 인간이야말로 최악의 재앙을 겪은 존재일 것이다.

북소리 울려 목숨을 재촉하는데
머리 들어 바라보니 해는 서산에 걸렸구나.
외로운 황천길에 주막도 없다 하니
오늘밤은 뉘 집에서 자고 가야 하나
          成三問(성삼문 - 絶命詩(절명시)

단종을 밀어낸 수양 대군을 섬길 수 없다 하여 아무렇지도 않게 목숨을 내 던진 사육신 성삼문에게 조차도 외로움은 견디기 어려운 과제였나 보다.

나 자신이 허깨비처럼 느껴질 때 외로움의 존재는 어쩌면 신의 영역일 것이다. 신께서 외로움만 떨쳐주신다면 첨탑의 꼭대기 위에 한 발로 서서 지구를 들고도 힘들어하지 않겠다. 외로움만 극복하게 허락해 주신다면 세계정복의 길도 홀로 받아들이겠다. 외로움만 이길 수 있게 해 주신다면 물 위를 걷는 여신처럼 레이스 자락을 날리며 표표히 죽음의 나미비아 사막이라도 건널 것이다.

성대한 예식을 마치고 침실로 돌아온 신부처럼 어깨 끈을 내리고 드레스를 벗어던지듯 외로움을 쓸어내리고 싶었다.
어느 날 잠자리에 들며 깨달았다. 외로움의 표피는 결코 벗을 수 없는 것이며 잠에 드는 그 순간까지도 침낭처럼 내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이란걸! 이제 나는 이 아이와 함께 살기로 작정했다. 50년 넘게 나를 따라다니는 진상 스토커 외로움을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적을 두려워 하지 않는 장수처럼 온몸으로 외로움의 화살을 받아들이겠다. 난 이 아이를 길들이기로 작정했다. 외로움이라는 사생아를!


      -2022년 7월의 마지막 밤에 외로움의 칼날 위에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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