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대 여자의 어느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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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대 여자의 어느 하루
  • 정온 수필가
  • 승인 2022.09.19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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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온 수필가

'에리니에스'
아름답기로 유명한 그리스 여신들 중 흉측하고 기괴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신과 인간들 모두에게 존경받는 여신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에리니에스'이다.

메두사처럼 뱀이 머리를 휘감고 있고, 피눈물을 흘리며 한쪽 손에는 횃불, 다른 손에는 채찍을 들고 있다. 이들은 살아있는 자뿐만이 아니라 죽어있는 자까지도 반드시 찾아내어 끝까지 복수와 저주를 한다. 나는 그녀들의 집요함과 단호함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자신들의 저주와 복수를 남용하지도 않으며 명분은 뚜렷해서 그 누구도 에리니에스를 비판하지 않는다. 따라서 <광폭한 여신들>에서 <자비로운 여신으로> 바꾸어 불리게 된다. 진정한 자비란 죄의 경중을 따져서 정확히 가르쳐 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이 자리 세 자매인 그녀들을 초대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성문법인 함무라비 법전( 法典, 영어: Code of Hammurabi)은 기원전 1792년에서 1750년에 바빌론을 통치한 함무라비 왕이 반포한 고대 바빌로니아의 법전이다. 놀랍게도 이 법전은 무고죄를 가장 먼저 언급한다.
제1조에 보면, 사람이 타인에게 죄를 돌려 살인죄로 그를 고발하고 그에게 확증하지 못하면, 그에게 죄를 돌린 자(즉 고발자)를 죽인다. 함무라비 법전은 '동해보복'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피해자가 받은 피해 정도와 동일한 손해를 가해자에게 내리는 보복 법칙"이다. 어찌보면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법칙이다. 고대인들도 잘 아는 것을 왜 작금, 우리는 알지 못하는가!

고통이 따깨비처럼 뇌에 꼭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던 나날들이었다. 코로나로 억울하게 고발을 여러 차례 당해서 나 자신을 원심 분리기 속에 넣고 돌려 버리고 싶은 시간이었다. 내 안에 무엇이 있을까? 피와 뼈와 살이 분리된 시간이었다. 지난 1년 10개월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을 찐하게 체험한 시간이었다. 내 기억이 왜곡되기 전에 하나하나 다 기록해 두었다. 일상에는 기쁨도 쾌락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냥 죽지 않을 만큼만 먹고 버텼다. 음식을 즐거움으로 여기고 먹어대는 사람들을 증오했다. 누가 누가 많이 먹나를 자랑질하는 것을 보면 화가 치밀었다. 더 웃긴 건 어떤 누구도 그런 프로그램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음식은 거룩해야 한다. 오늘도 먹을게 있음을 감사해야한다. 나로 인해 누군가는 굶어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누군가로부터 소중한 것을 빼앗지 않았나 돌아보았다. 모든 것을 빼앗긴 그 시간에!

그들로부터 내 인생이 망가지지 않게 꼭꼭 걸쇠를 채워야겠다. 숟가락만 문고리에 걸고 겁탈당한 느낌이었다. 모든 것은 그렇게 허술하게 발생했다. 기억에 기대어 말할 수 없음이여!!

1년 11개월이 지난 후 처음으로 최대 가해자인 교육청 김××과장과 통화를 했다. 그녀는 침착하고 노련한 행정가답게 "죄송합니다. 사실 기억이 잘 안납니다"라고 했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답이었다. 모른다고, 모른다고.

난 매일매일 폐병 환자처럼 검붉은 피를 토했는데!! 기억이 안 난다고 용서받을 수 있을까? 사화산에 불을 던지고 휴화산에 입김을 불어넣고 활화산을 손으로 뜯어 버리고 싶은 분노가 치밀었다. 지구가 권태로움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고 거머리 같은 인간을 탈탈 털어 버릴 것 같은 그런 순간이었다. 내가 아는 한, 지난 코로나로 인해 가장 많이 망가진 사람은 나였다. 내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게 정답인 것이다.
삶에서 힘든 순간은 항상 있었다. 30대의 나와 40대의 나, 그리고 지금 50대의 내가 느끼는 미움과 정념 그리고 복수는 분명 다르다. 모든 게 다 공허하고 내리막길을 향해 달리는 늙음의 초입에서 핵폭탄을 온몸으로 받아낸 기분이었다. 갑자기 나 자신도 거실바닥에 화장지를 마구 풀어놓고 식탁 위에 우유를 엎질러 놓고 해맑게 웃고 용서받고 싶어진다.

40년 전 마당 가운데 수도를 두고 이집저집이 마구 엉켜 살던 그때 도둑이 들었다. 아버지께서는 야구 방망이를 들고 내 방문앞에서 주무셨다. 그런 아버지께서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가하겠다고 지난 추석날에 폭탄선언을 했다. 가족들이 회의를 한 결과 어머니 왈 "늙어빠진 쭈글탱이를 누가 받아줘?"란 의견과 큰사위의 "눈도 안 좋으셔서 러시아군 우크라이나군도 구별조차 못 하실텐데 참으세요!"란 의견이 압도적 지지를 받고 아버지의  의견은 묵살되었다. 돈키호테 같은 아버지 덕분에 가족 모두 웃고 지나갔다.

"아버지! 제발 저 여자 좀 때려 주세요"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내 방문 앞에 다시 서 달라고 매달리고 싶어졌다. 내 삶을 다 훔쳐간 그들을 사정없이 패주세요!라고. 더군다나 자신이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는 말은 살인  후, 사형장 앞에 선 가해자가 "이제 천국갑니다. 할렐루야!" 하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그녀의 평화로운 음성은 내 마음의 모든 평온을 앗아갔다. 집요하고 악랄하게 모든 것을 다 뺏어가고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난 그들을 용서하고 싶어서 어떻게든"명분"을 주고 싶었다. 그녀는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께선 용서하라고 아니 잊으라고 하셨다. 그 말씀이 당신께선 절대 잊지않으시겠다는 단호한 말로 들렸다.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마트료 시카' 인형처럼 차곡차곡 쌓아둔다.
어릴적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내 다리 돌려줘> 라는 한국 토종 좀비인지 귀신인지 유령이 나한테 붙어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코로나 이전의 내 삶좀 제발 돌려줘" 라고 부르짖으며 끝까지 따라다니며 매달리고 싶다.
이제 착한 딸, 충실한 며느리, 순종적인 시민 다 그만 두기로 작정했다. 꾹꾹 눌러 잠재워 둔 휴화산처럼 숨어있던 모든 분노가 폭발했기 때문이다.
중국엔 '군자보구 십년불만(君子報仇 十年不晩)란 속담이 있는데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란 말이다. 군자라면 순간적인 흥분으로 허술하게 복수하려 해선 안 되고 10년을 들여서라도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는 말이다. 시간을 가늠해 본다. 앞으로 8년 남았다.

은행에서 뒤따라 들어오시던 어떤 여사님께서 "뒷모습 보고 아가씨인 줄 알았는데 아니네!"하셔서 하루 종일 어떻게 해야 뒷모습과 앞 모습의 나이를 동전처럼 같은 값을 유지할 수 있는지 고민하다 보낸 하루였다. 외모비하 발언 한마디에 행복이 날아가 버린 하루! 지나친 빛과 거름으로 오히려 쪼그라드는 화초 같은 하루! 과거의 상처가 가시가 되어  여기저기 마구 찔러대는 하루! 이게 바로 "50대 여자의 하루"이다.
정신과 병동 여기저기 서 있는 나무들이 손금 봐달라고 자꾸 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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