若無湖南 是無國家也(약무호남 시무국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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若無湖南 是無國家也(약무호남 시무국가야) 
  • 장상현 인문학 교수
  • 승인 2023.01.3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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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현 인문학 교수

제15편: 若無湖南 是無國家也(약무호남 시무국가야) 의의(意義)에 붙인다

 

“若無湖南 是無國家也(약무호남 시무국가야/ 만약 호남이 없어진다면 나라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 말은 계사년(癸巳年/ 1593) 7월 16일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진(陳)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긴 다음날 희암(希菴) 현덕승(玄德升)에게 올리는 답서에 기록된 구절이다.

이 글귀는 호남인(湖南人)들이 가장 긍지를 가지고 있는 말이기도 하지만, 백성들이 구국(救國)을 위해 진정으로 헌신(獻身)한 충정(衷情) 어린 소중한 교훈이기도 하다.

​이 글귀는 호남의 각 시ㆍ군 또는 각계 인사들이 인용하기를 즐겨하면서 이 구절의 출처가 국보 76호인 난중일기(亂中日記)에 기록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이 말은 임진란(壬辰亂) 중에 이순신 장군이 표현한 문구이기는 한데 난중일기에는 그 말이 없고, 정확히 말한다면 충무공(忠武公)이 당시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재직되어 있던 현덕승(玄德升)에게 답장을 쓴 내용 중에 언급된 것이다. 

​이 편지는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 7월 16일 자로, 김천일(金千鎰) 의병장(義兵長)과 호남의 제 장졸(諸將卒)들이 진주성(晉州城) 제2차 혈전(血戰)에서 모두 순절(殉節)했던 6월 29일을 약 보름 정도 지난 시기이다. 

​이 책은 李忠武公全書(卷13) 附錄(5) 紀實(上)로 정조대왕의 명령으로 규장각 문신 윤행필(尹行弼/ 뒤 이조판서)과 예문관 검서관이 편찬하고, 정조 19년에 출판되었다. 

여기에 “​舜臣每戰勝 輒戒諸將曰 狃勝必驕 諸將愼之(순신매전승 첩계제장왈 뉴승필교 제장신지/ ​순신은 언제나 싸움에 이길 적마다 문득 모든 장수에게 훈계하길 너무 지나치게 이기기만 하면 반드시 교만하게 되니 여러 장수들은 조심하라”하였다.

“​時賊屢窺湖南 舜臣以爲 國家軍儲 皆靠湖南(시적루규호남 순신이위 국가군저 개고호남/ 그때 (왜)적이 자주 호남지방을 노리고 있음으로 순신은 (우리)나라의 군비(군사, 군량 등)는 다 호남에 의존하고 있다.”고 하고 “若無湖南 是無國家也(약무호남 시무국가야/ 만약 호남이 없어진다면 이 나라는 없어지는 것)” 이라고 했던 것이다​.

​“先時 賊將平行長 到平壤投書曰 舟師十餘萬 又從西海而來未知 大王龍馭 自此何之(선시 적장평행장 도평양투서왈 주사십여만 우종서해이래미지 대왕용어 자차하지/ ​지난번 적의 장수 行長(소서행장)이 평양에 이르러 편지를 보내어 수군 10여만이 또 서쪽 바다를 따라 올라오는데 알지 못하고 대왕의 행차는 어디로 갈 것이오.”

​“盖賊本欲 水陸合勢西下 賴此一戰 遂斷賊一臂(개적본욕 수륙합세서하 뇌차일전 수단적일비/ 아마도 적이 본래 하고자 하는 것은 수륙으로 합세하여 서쪽으로 내려가는 것이었는데, 이 한 전투로 말미암아 마침내 적의 한 팔이 끊겼으니

​行長雖得平壤 勢孤不敢更進(행장수득평양 세고불감갱진/ 행장(소서행장)이 비록 평양을 차지했지만 세력이 홀로되어 감히 다시 전진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상이 李忠武公 全書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에 서신을 보낸 이유를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 호남인들의 구국충절의식과 의병(義兵)의 활약상을 알 수 있고

둘째, 호남 곡창에서 생산된 미곡으로 우리의 군량미의 보급과 적의 군량 보급방지 역할

셋째, 민, 관, 군 대동단결의 힘만이 전 호남인이 한마음이 되어 해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확신을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임진란 때의 의병은 대부분 국지적 향토방위전(鄕土防衛戰)이었다면, 호남 의병은 국토방위전(國土防衛戰)에 참가하여 한양 수복과 진주성 전투 참가 등 혁혁한 공을 세워 이것이 조선 방방곡곡 항쟁의 계기가 되었던 점을 깊이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군의 절대 중과부적(衆寡不敵)상황에서도 진주성 전투를 죽음으로 사수했던 나주(羅州)의 김천일(金千鎰)의병장이 “호남은 나라의 근본이고 진주는 실로 호남의 울타리이다”하고 진주를 지킴으로서 호남을 보호할 것을 주장하는 최후 결전의 일성(一聲)을 한 것으로 보아  군량미는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절대적인 요소인데, 그 당시 호남 곡창에서의 군량미 보급은 이순신 장군이 기필코 해전을 승리를 이끈 가장 큰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거북선을 만들고 남해안의 물때를 정확히 알고 있고, 또 그들의 충정어린 구국의식(救國意識)을 가진 모든 장졸(將卒)때문에 이순신이 해전에서 연전연승을 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1591년 오늘날 여수 땅인 전라좌수영 좌수사로 부임해와 이러한 호남인의 신뢰와 자신감을 바탕으로 준비를 철저히 했고, 드디어 이듬해인 1592년 임진란이 발발하자 자신 있게 모든 전투에 참가하여 연전연승을 거둔 것이다.

그리하여 1952년 6월 16일(음력 5월 7일) 제1차 ‘옥포해전(玉浦海戰)’의 승리를 시작으로, 7월 10일(음력 6월 2일) 제2차 당포해전(唐浦海戰) 승리와, 이어 8월 14일(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른바 ‘학익진(鶴翼陣)의 전법’으로 제3차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을 이룬 것이며, 9월 1일 부산포 해전 승리 등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당시 조선은 열세의 군사력으로 일본군에게 초기의 힘든 전쟁을 치르며, 비록 국토는 유린되었지만 호남을 기점으로 전국이 대동단결하여 구국활동이 요원(燎原)의 불길처럼 일어나 마침내 왜군을 물리치고 국권을 회복하였던 것이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안타깝게 지역, 이념, 노사, 빈부, 등 여러모로 분열되어 균열의 최고점에 가까워져 가고 있다.

이제 이순신 장군의 말을 조금 바꾸어서 遂無團合 是無大韓也(수무단합 시무대한야/ 마침내 국민의 단합이 없다면, 이 대한민국은 없는 것이다)의 정신으로 국가 부흥의 불길이 들불처럼 번져 국민이 대동단결하여 다시 번영(繁榮)의 길로 비약(飛躍)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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