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4일은 안중근 의사 사형 선고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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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4일은 안중근 의사 사형 선고일입니다
  • 김용복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2.14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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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복 칼럼니스트

- 옮겨온 글로 필자가 조금 각색했습니다. -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시는지요?

2월 14일 오늘은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은 날입니다. 초콜릿 선물하는 발렌타인데이가 아닙니다. 따라서 오늘만큼은 나라위해 목숨 바친 안중근 의사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지냅시다. 

옮겨온 글 보실까요?

이토를 사살한 안중근의 어머니 역시 대장부(大丈婦)였다. 대한 대장부를 낳은 항일운동의 어머니인 모친 조마리아趙馬利亞 여사는 배천 조씨로, 1862년에 태어나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 광석동에 살던 동갑내기인 순흥 안씨 집안의 셋째 아들 태훈과 혼인하였다. 

그 사이에 태어난 장남이 바로 영웅 안중근이다. 
남편 안태훈은 여러 형제 중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한 후 개화파에 연루되어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서 신천군 두라면 천봉산 아래 청계동으로 이주하였다. 
조마리아는 6세 된 안중근을 데리고 청계동에서 살림을 새로 시작하여 가족의 대소사를 도맡으며 가정을 건사하였다.

조마리아 여사와 두 아들

당시 일제는 우리 정부 재정을 장악하기 위해 일부러 거액의 차관을 제공하여 1907년 정미년 당시 대일 차관액은 대한제국 1년 예산에 맞먹는 1,300만환이었다. 이에 대구에서 서상돈 등의 발의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일어났다. 

이는 뒷날의 물산장려운동이나 IMF 구제금융 시, 금(金)모으기 운동 때와 같이 남녀노소 귀천을 떠난 거족적인 구국운동이었다. 이때 조마리아 여사도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당시 안중근이 세운 진남포 삼흥학교 교원과 학생들이 34원 60전의 국채보상 의연금을 냈고, 어머니 조마리아 역시 은가락지 두 쌍을 비롯한 패물 20원 어치를 ‘안중근 자친’ 명의로 출연하였다.

1909년 안중근에 의해 이토가 사살된 후, 조마리아는 직접 평양으로가 변호사로서 명성과 애국심이 강한 안병찬을 만나 변호를 부탁하였다. 당시 이를 두고 조마리아를 조사한 일제 순사와 헌병들에게 그녀는 태연한 모습으로 응대하였다고 한다. 

 

조마리아 여사 편지

1910년 일제에 의해 사형이 언도되자, 안중근은 항소를 포기했다. 
호생오사(好生惡死)는 인지상정이건만. 살아있는 존재들이 본능적으로 잡고 싶어하는 생명에 대한 본성을 저버리고 대의를 택한 데에는 어머니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사형 언도 소식을 들은 조마리아는 아들 정근과 공근 형제 편에 간결하면서도 단호한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전언으로만 알려져 있을 뿐, 안타깝게도 그 진짜 편지는 남아 있지 않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만약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를 위해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壽衣)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사랑하는 자식이 살기를 그 누구보다도 더 간절히 바랐을 어머니 조마리아.
대의를 위해 죽고,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듯한 인상을 두지 말고 죽어라.
그렇게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라고 이야기하는 이 강한 어머니.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었다.

아들을 사랑했기에 그 아들이 사랑한 조국을 위해 살아가려는 확신이 있지 않았을까?
모친의 전언을 받은 안중근 장군의 심경은 어떠하였을지 태연하고 순결했던 순국 모습에서 우리는 짐작해 볼 수 있으리라. 이와 관련하여 1910년 2월 30일 자 '대한매일신보'에는 ‘놀라운 부인 是母是子’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여기서 ‘시모시자是母是子’란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란 의미로서, 본 기사에는 “안중근이 한 일은 우리가 이미 놀라고 있지만 그 어머니의 사람됨도 한국에 드문 인물이라고 하였다더라.”고 적고 있다.

 

안중근 의사 아들 친일행적과 일족들의 독립운동

순국 후 안중근 일가는 일제의 핍박을 피해 해외 망명길에 올랐다. 
조마리아의 삶은 더욱 단단해졌다. 
남은 두 아들과 함께 러시아로 만주로 상해로 옮겨가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그 와중에 큰손자이자 안중근의 장남 분도는 12세에 일제 밀정에 의해 독살을 당했고, 차남 준생은 살기위해 이토의 손자 이토 도시에게 사과를 하는 등 친일행각을 해 세인들로부터 호부견자(虎父犬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간악한 일제는 안중근 일족을 멸족시키려 했고, 일족들은 탄압과 감시로 평탄한 삶이 불가능했다. 
모든 게 ‘안중근 유족’이기에 떠안아야 하는 운명이고 숙명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안중근 일족 중에는 독립운동과 해방 뒤 통일 운동에 종사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독립운동의 경우에도 한 가문에서 가장 많은 서훈자(敍勳者)가 나왔고 참여 인사는 40여 명으로 추정된다.
대표적으로 두 동생인 정근(임정요인, 독립장 수훈), 공근(임정요인, 독립장 수훈), 사촌 명근(임정요인, 독립장 수훈), 경근(임정요인, 독립장 수훈)과 봉생(독립운동가, 애국장 수훈), 원생(한국 광복군, 애족장 수훈), 낙생(한국 광복군, 애족장 수훈), 진생(흥인장 수훈), 당질 춘생(광복군 제 1지대 간부, 독립장 수훈), 안명근의 매제 최익형 그리고 안춘생의 부인 조순옥 등이다. 오촌 조카 안우생은 백범 김구 선생의 대외 담당 비서로 김구의 밀서를 북으로 갖고 들어가 김일성과 김두봉을 만나 남북연석회의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정근의 딸 안미생은 백범의 장남인 김인과 결혼하여 독립운동을 내조하고, 해방 후에는 백범의 비서로서 보좌했다.

현재 소재가 파악되는 안중근의 혈연으로는 외손녀 황은주, 황은실과 조카 안춘생 씨, 안정근의 며느리 박태정 씨 정도이다.

대를 이어가며 항일 광복의 길을 걸었던 안중근 집안의 정신적 구심점은 모친인 조마리아였다. 
동쪽으로는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로, 서쪽으로는 바이칼에 이르기까지 동포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여념이 없었고 독립운동 지원과 함께 스스로도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27년 7월 15일 조마리아는 향년 66세로 머나먼 이국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지켜보지 못하고 순국하였다.
장례는 프랑스 조계 천주교당에서 상해 교민장으로 치러졌는데 이후 묘지 터가 개발되어 묘소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안중근 의사 이토 히로부미 저격 유언 유해 동양평화론 명언 안응칠 역사

男兒有志出洋外(남아유지출양외) 사나이 뜻을 품고 나라 밖에 나왔다가
事不入謀難處身(사불입모난처신) 큰일을 못 이루니 몸 두기 어려워라.
望須同胞誓流血(망수동포서유혈) 바라건대 동포들아 죽기를 맹세하고
莫作世間無義神(막작세간무의신) 세상에 의리 없는 귀신은 되지 말자.

-영산전투 참패 후 안중근 장군이 상심한 대원들을 격려한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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