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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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
  • 장상현 인문학 교수
  • 승인 2023.02.2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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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간담을 서늘케한 황성신문 논설(論說)
장상현 인문학 교수

제17편: 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

 

2023년 올해는 삼일만세운동(三一萬歲運動) 104주년을 맞는 해이다.

우리 국민은 삼일정신을 절대 잊으면 안 된다. 이는 영혼까지 빼앗긴 민족의 영혼을 다시 소생시킨 우국충정(憂國衷情)의 위대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단군(檀君) 이래 무수한 외세의 침략을 받고도 잘 견디며 서로를 도와 지금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과 최고의 IT 강국임을 자타가 인정하는 매우 우수하고 합리적인 탁월(卓越)한 민족으로 세계인들에게 평가받고 있다.

역사학자들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외세의 침략을 약 900여 회라고 한다.

그중 가장 치욕스러운 경우가 ‘임진왜란(壬辰倭亂)’, ‘병자호란(丙子胡亂)’,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우리 민족이 남긴 삼대 명문장(名文章)은 최치원(崔致遠)의 ‘격황소서(檄黃巢書)’와 최남선(崔南善)선생이 초안을 작성했다는 ‘3.1독립선언문(三一獨立宣言文)’, 장지연(張志淵)선생의 황성신문(皇城新聞)의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꼽는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은 ‘이날에 목 놓아 크게 우노라’는 뜻을 갖는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의 역사적 요약은 이렇다.

조선말 동학농민운동으로 국기가 흔들리자 조정은 반란군 진압이라는 명분으로 청나라와 일본에게 요청하여 양국의 군대가 조선에 파병된다. 이를 계기로 청나라와 일본은 서로 견제를 넘어 전쟁까지 하여 결국은 청ㆍ일 전쟁을 일으키고 일본이 승리하게 된다.

이에 힘을 얻은 일본은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갖은 술수와 협박을 하게 되고, 드디어 1905년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한다.(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하여 강제적으로 맺은 조약)

勒은 굴레 늑(륵)자로 '굴레를 씌워 꼼짝 못하게 하다'라는 뜻이다. 소(牛)나 말(馬)에 굴레를 씌우면 어린아이도 그 소나 말을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다.

이어서 일본은 조선 침략의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조선의 대신(大臣/지금의 장관)들을 협박하고 일진회(一進會)를 조직하여 그들이 앞장서 조선 침탈을 돕고 홍보 역할을 담당하게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일본 침략 정책을 거부하는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국권을 자기 마음대로 전횡함은 물론 식민지정책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이어 1907년 7월 19일 고종황제 강제 퇴위

1909년 12월 26일 안중근 의사(安重根 義士) 일본의 이등박문(伊藤博文) 저격

1910년 2월 14일 안중근 의사 사형선고

1910년 3월 26일 안중군 의사 사형집행(32세)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체결(경술국치) : 대한제국 멸망 ➯ 조선 식민통치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문 낭독 및 삼일만세운동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945년 8월 15일 대한 독립

참으로 숨 가쁘게 진행된 일본의 조선강점기 정책 및 실천과 항일투쟁의 요약이다

당시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주필이었던 장지연(張志淵)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논설을 써서 을사조약의 굴욕적인 내용을 폭로하고, 일본의 흉계를 통렬히 공박하여 그 사실을 전 국민에게 알렸다.

이로 인하여 황성신문은 사전 검열을 받지 않고 신문을 배포하였다고 해서 3개월간 정간되었으며, 그는 일본 관헌에 붙잡혀서 90여 일간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 논설은 국한문혼용체로 쓰여 졌는데, 그 내용은 민족 정의를 호소하면서 격렬하고 비분강개(悲憤慷慨)한 논조를 담고 있다.

‘전날 이등(伊藤)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백성들은 모두 말하기를 “이등은 평소 동양 3국을 정족(鼎足)처럼 안전한 태세로 올려놓는 일을 스스로 주선했던 사람이니 그의 내한은 필시 우리의 독립을 공고히 할 방침을 권고하기 위함일 것이다.”라고 하여 항구로부터 서울로 들어오기까지 관ㆍ민(官.民)상하가 모두 환영하였다. 세상이란 참으로 알 수 없도다. 천만뜻밖에도 다섯 가지 조건이 어디서 나왔단 말이더냐. 이 다섯 조건은 비단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동양 3국을 분열시킬 징조를 만드는 것인즉, 이등(이등박문)의 원래의 뜻이 어디로 가버렸단 말인가.

더욱이 우리의 대황제 폐하는 강경한 성의(聖意)로 이를 끝까지 거절하였으니, 이 조약이 성립되지 아니함은 이등 자신이 너무도 잘 알리라. 그러하거늘 아아,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나라의 대신이라는 자들은 영리만 바라고, 거짓 위협에 겁을 먹고 우물쭈물하다가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스스로 매국노가 됨으로써 4,000년 강토와 500년 종사를 남에게 바치고 2,000만 동포로 하여금 남의 노예가 되도록 하였구나!

저 개돼지만도 못한 외부대신 박제순 이하 여러 대신은 꾸짖을 가치조차 없거니와 명색이 참정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우두머리로서 어찌 “부(否)” 글자 하나로써 책임을 모면하려고 하였느냐. 김상헌(金尙憲)과 같이 문서를 찢어 통곡하지도 못하였고, 정온(鄭蘊)과 같이 배를 가르지도 못하였으니 구차하게 살아서 세상에 서 있은들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 폐하를 다시 뵈올 것이며 무슨 면목으로 2,000만 동포를 다시 대하겠느냐.

오호통재라. 우리 2,000만 노예가 되어버린 동포여!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 단군, 기자, 이래 4,000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갑작스레 멸망해버린단 말이냐. 분하도다. 분하도다. 동포여, 동포여!'

이 논설은 식민정책을 드러낸 일본을 표적으로 삼았지만 을사조약에 서명한 을사5적(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을 통렬히 공박하고 있다.

이것은 한말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을 통한 항일 언론활동의 대표적인 논설이다.

이 논설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항일운동과 의병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수많은 의사(義士), 열사(烈士), 애국투사들이 조국 독립을 위해 소중한 목숨을 바쳤다.

힘을 믿고 약소국을 침략한 일본도 용서받을 수 없지만,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선 을사오적과 일진회 요원들이 더 밉게 느껴진다. 마치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운 것처럼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이중성의 권력층이 더 미워지는 것이다.

조선시대 이정구(李廷龜)선생의 충언을 보자.
國必自伐而後外寇伐之 人必自戕而後客邪戕之(국필자벌이후외구벌지 인필자장이후객사장지/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혼란이 있은 후에 외적이 와서 치고,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 자신을 해친 후에 사특한 기운이 와서 해친다.)

일국(一國)은 내부적인 갈등(葛藤)과 자체적 분열(分裂)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가장 빠른 길임을 깊이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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