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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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 장상현 인문학 교수
  • 승인 2023.03.2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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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왔으나 봄 같지 않다
장상현 인문학교수
장상현 인문학 교수

제 19편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 봄은 왔으나 봄 같지 않다.

❍글 자 : 春(봄 춘)  來(올 래)  不(아니 불)  似(같을 사)

❍출 전 : 한서원제기, 흉노전(漢書元帝紀 匈奴傳), 후한서, 남흉노전(後漢書 南匈奴傳)

❍비 유 : 절기로는 분명 봄이지만 봄 같지 않은 추운 날씨가 이어질 때. 좋은 시절이 왔어도 상황이나 마음이 아직 여의치 못함을 비유함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 오랑캐 나라 땅엔 꽃도 풀도 없어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네

自然衣帶緩(자연의대완) : 옷에 매는 허리 끈이 자연히 헐렁해지는 것이

非是爲腰身(비시위요신) : 내 몸에 잘록한 허리 몸매를(보이기) 위함이 아닌 것을

이 詩는 당(唐)나라의 시인 동방규(東方虯)가 쓴 소군원(昭君怨)이라는 詩에 나오는 구절이다. 詩의 주인공인 왕소군(王昭君)은 서시(西施), 초선(貂선), 양귀비(楊貴妃)와 함께 중국 고대의 4대 미인이라 한다. 그들은 미모도 미모려니와 그녀들의 삶이 중국 역사를 대변할 만큼 파란만장(波瀾萬丈)했기 때문에 두고두고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膾炙)되고 있다.

또한 1979년 10·26 사태 후,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 주도로 12·12사태가 발생하여 한때 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사라졌을 때, 당시 공화당 총재였던 김종필 전 총리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빗대어 인용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이야기를 살펴보자.

한(漢)의 원제(元帝)는 전국에 후궁을 모집한다는 조서를 내렸는데, 전국 각지에서 선발되어 입궁한 궁녀들의 수가 천여 명에 이르렀다. 이때 왕소군(본명 왕장(王嬙))도 18세의 나이에 후궁으로 선발되었다. 황제는 천여 명에 이르는 궁녀들의 신상을 일일이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연수(毛延壽) 등 화공들에게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려 바치게 했다. 그러자 부귀한 집안 출신이나 수도 장안(長安)에 후원자가 있는 궁녀들은 화공에게 자신의 모습을 예쁘게 그려 달라고 뇌물을 바쳤으나, 왕소군은 집안이 가난하여 아는 사람도 없는 데다 자신의 용모를 황제에게 속일 마음이 없었으므로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모연수는 뇌물을 바치지 않은 왕소군의 용모를 형편없이 못생기게 그려 버렸다. 왕소군은 입궁한 지 5년이 흐르도록 황제의 얼굴도 볼 수가 없었다.

원제(元帝) 시대, 남흉노의 호한야(呼韓邪)선우(單于)가 원제를 알현하기 위해 장안(長安)으로 왔다. 호한야는 모피와 준마 등 많은 공물을 가지고 와서 원제에게 공손하게 문안을 올렸다. 크게 기뻐한 원제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호한야 선우를 환대했다. 호한야는 원제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황제의 사위가 되고 싶다고 청하였다. 원제는 그의 청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공주를 시집보내기 전에 먼저 그에게 한나라 황실의 위엄을 과시하고 싶어 자기 후궁 중에서 아직 총애를 받지 못한 미녀들을 불러와 술을 권하게 했다. 궁녀들이 들어오자 호한야는 다채로운 모습에 한참 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그중에서 절세의 미인을 발견하고는 즉시 원제에게 또 다른 제의를 했다. “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꼭 공주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저 미녀들 중의 한 명이어도 괜찮습니다.” 원제는 원래 종실의 공주들 중에서 한 명을 택하려고 하였으나 이제 궁녀들 중에서 한 명을 선발한다면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 호한야의 제의를 즉석에서 수락하였다. 호한야는 왕소군을 지목했다.

처음으로 본 너무나 아름다운 왕소군의 미모에 원제도 그만 반하고 말았다. 그러나 황제로서 한번 내린 결정을 다시 번복할 수도 없었다.

원제는 연회가 끝난 후 급히 돌아가서 궁녀들의 초상화를 다시 대조해 보았다. 왕소군의 그림이 본래의 모습과는 너무 다른 것을 발견한 원제는 화공인 모연수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라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토록 명령하였다. 모연수는 결국 황제를 기만한 죄로 참수되었다. 원제는 호한야에게는 혼수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 3일만 기다리라고 속이고는 조용히 왕소군을 미앙궁(未央宮)으로 불러 사흘 밤 사흘 낮을 함께 보냈다. 3일 후, 왕소군은 흉노족 차림으로 단장을 하고 미앙궁에서 원제에게 작별을 고하였으며, 원제는 그녀에게 소군(昭君)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정략결혼의 희생으로 흉노 땅에 온 왕소군은 그곳 여인들에게 글과 가무, 길쌈하는 방법 등을 가르쳤고, 한나라와의 우호적인 관계 유지를 위해 노력하여 그 후 80여 년 동안 흉노(匈奴)와 한(漢)의 분쟁은 없었으므로 그녀는 흉노족에게 큰 존경을 받았다.

그 후 호한야 선우가 죽은 후, 흉노의 풍습에 따라 호한야 본처 아들인 복주루(復株累)아내가 되어 딸 둘을 낳았다.

세월이 흘러 왕소군이 죽은 후 그 시신은 대흑하(大黑河) 남쪽 기슭에 묻혔다. 왕소군의 묘는 내몽고 후허하오터(呼和浩特) 남쪽 9킬로미터 지점에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가을에 접어든 이후 북방의 초목이 모두 누렇게 시들어도 오직 왕소군 무덤의 풀 만은 푸름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에 ‘청총(靑塚)’이라 하였다고 한다.

비운의 여인 왕소군의 고사가 남긴 교훈인 권력의 핵심을 둘러싼 넘쳐나는 궁중의 권모술수와 이를 이용한 권력투쟁은 오늘날도 이어지고 있다.(자중지란을 경계해야 함)

그리고 비록 약한 여인이지만 자기 운명을 받아들여 주어진 여건 속에서 지혜를 발휘하여 모두가 이득이 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오늘날 권력에 눈이 멀어버려 무슨 짓이던 할 수 있는 비열한 사람들과는 너무나 다른 진정한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문득 조선 중기 말 강이천(姜彛天)선생의 “莫畏於慾 莫善於忍(막외어욕 막선어인/ 욕망보다 무서운 것은 없고, 인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라는 교훈의 말씀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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