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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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 장상현 인문학 교수
  • 승인 2023.05.0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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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현 인문학 교수

제 21편: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장군의 탄신일(誕辰日)을 생각하며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반드시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이는 명량해전(鳴梁海戰)을 앞두고 군사들에게 훈유(訓諭)한 내용 중의 하나다. 이는 장군의 기개(氣槪)를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내용이다.

이순신(李舜臣)장군의 본관(本貫)은 덕수(德水). 자(字)는 여해(汝諧). 시호(諡號)는 충무(忠武)이다.

장군은 1545년 4월 28일 서울 건천동(乾川洞: 지금의 중구 인현동)에서 출생하였다.

집안은 고려 때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李敦守)로부터 내려오는 문반(文班)의 가문으로, 이돈수(李敦守)의 12대손이다. 아버지는 이정(李貞)이며, 어머니는 초계 변씨(草溪卞氏)로 아들을 올바르게 기른 훌륭한 어머니이다.

장군의 형제는 위로 형님 두 분, 아우 한 분으로 모두 4형제였다. 형제들의 이름은 돌림자인 신(臣)자 위에 중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성군(聖君)인 삼황오제(三皇五帝) 중에서 복희씨(伏羲氏)· 요(堯)임금, 순(舜)임금, 우(禹)임금을 시대 순으로 따서 붙여서 위로 이희신(李羲臣), 이요신(李堯臣)의 두 형과 본인 순신(舜臣) 그리고 아우는 이우신(李禹臣)으로 이름 지어져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군은 늦은 나이인 47세가 되던 해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되었다.

장군은 곧 왜침(倭侵)이 있을 것을 예상하여 좌수영(左水營: 여수)을 근거지로 삼아 전선(戰船)을 제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였고, 나아가서 군량의 확보를 위하여 해도(海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조정에 요청하기도 하였다.

장군의 처세는 오직 국가의 존립과 백성들의 편안함만을 생각한 성군(聖君)의 모습이었으며 탁월한 통찰력과 예리한 판단력을 소유한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였다.

장군의 장검(長劍)에 새겨진 글귀엔 “三尺誓天山河動色 一揮掃蕩血染山河(삼척서천산하동색 일휘소탕혈염산하/ 석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떨고,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하를 물들인다)”라는 문구를 보면 장군의 각오는 이미 일반 사람들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는 백전백승의 전장 지휘관상을 느끼게 한다.

 1598년(선조 31) 11월 19일 장군은 노량해전(露粱海戰)에서 전사했고, 왜란도 종결되었다. 그 뒤 구국의 명장(名將)을 국가에서 추숭(追崇/ 돌아가신 분의 지위를 뒤 시기에 올려주는 것)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애석한 것은 거대한 전란의 가장 중심에 있던  장군도 전란의 종결을 맛보지 못하고 전장에서 생애를 마감하게 된다.

장군은 1604년(선조 37) 선무(宣武) 1등 공신과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봉(追封)되고 좌의정에 가증(加贈)되었다.

1793년(정조 17)에는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고 2년 뒤에는 그의 문집인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가 왕명으로 간행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1960년대 후반부터 서울의 중심인 세종로에 동상이 세워지고 현충사(顯忠祠)가 대대적으로 정비됨으로써 그는 한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인인 성웅(聖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장군의 지휘관으로서 타고난 자질은 첫 출전인 옥포해전(玉浦海戰)의 시작 전 장군의 훈유(訓諭)에서 잘 나타나 있다. 곧 “勿令妄動 靜重如山(물령망동 정중여산/ 가벼이 움직이지 마라, 침착하게 태산같이 무겁게 행동하라.)” 라는 태산 같은 행동지침을 하달하고 있다. 손자병법에도 이와 비슷한 계칙이 있다. 이른바 “風林火山陰雷(풍림화산음뢰)”이다. 곧 風(바람처럼 빠르게), 林(숲처럼 고요하게), 火(불처럼 거세게), 山(산처럼 무겁게), 陰(그늘같이 숨고), 雷(번개같이 빠르게)이다.

장군의 연전연승 이유를 알만한 대목이다. 그는 병법에도 통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금을 울리는 충성심(忠誠心) : “저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확고한 신념(信念) : “必死卽生 必生卽死(필사즉생 필생즉사)”

즉음을 초월한 거인(巨人)의 모습 : “전투가 치열하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등의 참다운 교훈을 남기고 있다.

세계 해군 역사에 3대 해군 제독을 한국의 ‘이순신’, 영국의 ‘넬슨’, 일본의 ‘도고헤이하치로’로 정리하고 있다. 그중 단연 이순신 장군이 으뜸이며, 그는 해신(海神)으로까지 칭송받고 있다.

그 한 예로 일본이 러일전쟁 승전 축하연이 있던 날 밤, 어떤 기자가 도고 제독에게 "각하의 업적은 영국의 넬슨 제독, 조선의 이순신 제독에 비견할 만한 빛나는 업적이었습니다."라고 하자, 도고 제독은 그 기자를 즉각 야단을 치며 “나를 넬슨 제독에게 비유함은 가하나 이순신 제독에 비교하지 말라. 그분은 전쟁에 관한 한 신(神)의 경지에 오른 분이다. 이순신 제독은 국가의 지원도 제대로 받지 않고, 훨씬 더 나쁜 상황에서 매번 승리를 이끌어 내었다. 나를 전쟁의 신(神)이자 바다의 신(海神)이신 이순신 제독에게 비유하는 것은 신(神)에 대한 모독이다"라고 하였다.

또 미국 해군사관학교 4학년 생도들이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이들이 도고 제독을 방문하여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질문한 적이 있었다. 이때, 도고 제독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은 조선의 수군을 지휘한 이순신 제독입니다."라는 대답을 하였다. 그러자, 이순신이 누군지를 모르던 학생들이 이순신이란 인물에 대해 묻자, "이순신은 세계 해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독이며, 이순신과 비교하면 자신은 하급군인(下級軍人)도 못 된다."라고 이순신을 높이 평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다만 이 이야기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쟁 중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군의 소형 어뢰정 등에서 충무공의 신위를 올려놓고 제사를 지냈던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 이야기는 사실일 가능성이 더 높다.

점점 잊혀져가는 구국(救國)의 성웅(聖雄) 이순신, 우리는 장군의 탄신일(誕辰日)마저 잊는다면 역사를 안다고 할 수 없고, 장군 덕분에 현재를 편안하게 살고 있는 후예들은 무한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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