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良心)과 비양심(非良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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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良心)과 비양심(非良心)
  • 장상현 전 인문학 교수
  • 승인 2023.09.04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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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현 전 인문학 교수

제29편: 양심(良心)과 비양심(非良心)

양심(良心)을 국어사전에서는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말과 행동을 바르게 하려는 마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비양심(非良心)은 그 반대로 양심이 아닌 것, 양심을 속이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유가(儒家)에서는 ‘인간의 본성은 날 때부터 선(善)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른바 성선설(性善說)이다.

필자는 이에 공감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드라마를 보더라도 남에게 못되게 하는 사람을 보면 분노(忿怒)를 느끼고, 착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접할 때 측은지심(惻隱之心/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다.

필자는 칼럼을 대할 때 가급적 실존 인물의 이름을 직접 쓰기를 꺼려 왔다. 그런데 양심과 비양심을 생각할 때 너무나 인간적인 분노가 더해져 실명을 거론하고자 한다.

필자가 거론하고자 하는 사람은 두 사람으로 정치인 김남국(金南局)과 윤미향(尹美香)이다. 이 두 사람들의 비양심적인 행동과 사건은 이미 모든 국민들이 잘 알고 있어 생략하고자 한다.

단 인간의 탈을 쓰고 또 고위공직자로서 뉘우침은 고사하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양심(良心)마저 내팽개쳐버린 매우 뻔뻔스런 행동에 국민들은 화가 더 나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을 우리는 좋게 말해 후안무치(厚顔無恥/ 얼굴이 두꺼워 부끄러움이 없다)나 철면피(鐵面皮/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라고 혹평한다.

중국에 왕광원(王光遠)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과거에 합격할 정도로 글공부를 제법 잘했다. 하지만 친구들은 늘 왕광원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는 돈이 많거나 벼슬이 높은 사람에게 늘 몸을 낮추고 비위를 맞췄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리도 시(詩)를 잘 지으십니까? 이런 시(詩)는 처음 봅니다.”라든지

“무엇을 입으시든 잘 어울리시는군요. 눈이 부실 지경입니다.”라고 마음에도 없는 아부의 말과 행동을 하면, 옆에서 듣던 친구들이 왕광원에게 한마디씩 했다.

“자네는, 그 말을 하면서 부끄럽지도 않나?”

“그렇게 굽신거리다 새우처럼 등이 굽어 버리겠구먼.”

왕광원은 친구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벼슬이 조금이라도 높고 힘 있는 사람 앞에만 가면 늘 웃으며 듣기 좋은 말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왕광원과 술을 마시던 한 고위직 관료가 잔뜩 술에 취해 채찍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냉큼 달아났지만, 왕광원은 도망가기는커녕 오히려 등을 대 주었다.

짜~악, 짜~악 채찍을 맞은 왕광원의 등에서는 피가 배어 나왔다. 그러나 왕광원은 얼굴 하나 찌푸리지 않고 오히려 웃은 낯으로 고위직 관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속이 시원하십니까? 더 때리십시오, 더~! 대감께서는 채찍질을 아주 잘하시는군요.”

보고 있던 친구들이 혀를 찼다.

“저렇게 등을 맞으면서 비위를 맞추다니! 쯧쯧.” 그러자 왕광원은 웃으며 말하기를

“저 사람의 비위를 맞춰 두면 나중에 좋은 일이 생길 테니, 두고 보게.”

그 뒤 사람들은 왕광원에게 ‘철면피(鐵面皮)’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다. 이는 ‘왕광원의 얼굴 두께는 열 겹의 철로 된 갑옷과 같다.’라는 뜻이다.

그 뒤부터 지나치게 뻔뻔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을 ‘철면피(鐵面皮)’라고 부르게 되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자의(自意)든 타의(他意)든 또 알고 저지르던 모르고 저지르던 잘못을 저지르고 살 수밖에 없다. 애당초 인간은 완벽한 삶을 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며 새로운 삶을 모색하면서 남에게 해가 되는 일을 되풀이하지 않기 때문에 용서가 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갖는 욕심 중 재물(財物)에 관한 욕심이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작지 않다.

사람들은 뉘우침 없는 비양심의 인간을 볼 때 처절한 분노를 느끼게 된다. 이 두 의원(議員)은 아직도 국민을 속이고 자신의 양심까지 팔고 있다.

자신은 억울하다???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이러한 때에 옛 성인들의 말씀이 더욱 새롭게 조명됨은 인간의 가치와 양심을 내팽개치고 사는 자들 때문일 것이다.

공자께서

‘飯蔬食飮水하고 曲肱而枕之라도 樂亦在其中矣니 不義而富且貴는 於我如浮雲이라(반소사음수 곡굉이침지 낙역재기중의 불의이부차귀 어아여부운/ 거친 밥을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더라도 즐거움 또한 그 가운데에 있으니, 의(義)롭지 못하고서 부(富)하고 또 귀(貴)함은 나에게는 뜬구름과 같다.'라 하시니 새삼스럽다.(論語 述而篇)

大廈千間이라도 夜臥八尺이요 良田萬頃이라도 日食二升이니라(대하천간 야와팔척 양전만경 일식이승/ 넓고 큰 집이 천간(千間)이라도 밤의 잠자리는 여덟 자면 되고, 좋은 밭이 백만(百萬)이랑이라도 하루 식사(食事)는 두 되(곡식이)면 되니라.(明心寶鑑)

양심(良心)마저 저버린 자들! 그 말로는 결코 그리 평탄치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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