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기복례(克己復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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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기복례(克己復禮)
  • 장상현 전 인문학 교수
  • 승인 2023.11.06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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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현 전 인문학 교수
장상현 전 인문학 교수

제33편 : 극기복례(克己復禮), 자기(自己)를 이기고 예(禮)로 돌아온다.

극기복례(克己復禮)는 이길 극(克), 자기 기(己), 돌아올 복(復), 예절 예(禮)로서 “자기를 이기고 예절로 돌아온다.“ 곧 욕망(慾望)이나 사(詐)된 마음 등을 자기 자신의 의지력(意志力)으로 억제(抑制)하고 예의(禮儀)에 어그러지지 않도록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논어(論語), 안연(顔淵)편에 나온다. 

안연은 공자(孔子)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며 자기의 학통을 이을 사람으로 믿고 있던 수제자였다. 어느 날 안연이 공자에게 인(仁)에 대하여 물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나를 이기고 예(禮)에 돌아가는 것이 인(仁)이다. 하루만 나를 이겨 예(禮)로 돌아가면 천하가 인(仁)으로 돌아온다.”라고 했다.

공자의 이와 같은 대답에 안연이 인(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려 달라고 하자, 공자는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非禮勿視:비례물시),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고(非禮勿聽:비례물청), 예가 아니면 말도 하지 말고(非禮勿言:비례물언),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도 말라(非禮勿動:비례물동)”고 대답했다. 네 가지를 ‘사물잠(四勿箴)’이라고 한다.

이는 극기를 통해서 보고 듣는 것과 말과 행동을 예(禮)에 맞게 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이처럼 “하지 말라는 것”인 이 ‘사물잠’을 옛 선비들은 평소 암송하고 생활의 신조로 삼았다. 이황(李滉)이 사물잠을 필사해서 선조에게 바치자, 선조는 이 사물잠으로 병풍을 만들어 옆에 두고 늘 읽었다고 한다.

동양인의 사상 중 중심적인 주제는 충(忠), 효(孝), 예(禮)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 중 충(忠)은 나라를 위한 중심이고, 효(孝)는 가정을 위한 중심이고, 예(禮)는 사회를 위한 중심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한자로 표현된 예(禮)라는 글자는 ‘예기곡례상(禮記曲禮上)’에 의하면 무불경(毋不敬)이라하고 하여 ‘경(敬/ 공경할 경)’에서 예(禮)가 생기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본래 예(禮)의 구성은 示(神) + 豊(祭物)을 합한 글자로서 제기(祭器)에 제물(祭物)을 담아서 신(神)께 올리면서 최고의 공경(恭敬)을 표하는 마음이 예(禮)라는 것이다. (유학원론 제3장 제3절 B. 禮 참조)

이는 현대사회에서도 통용되고 있는 용어이다. 곧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받드는 신성한 행사를 예배(禮拜)라고 하고, 불교의 행사에 부처님을 공경하고 따르겠다는 마음 표시의 행사를 예불(禮佛)이라고 한다. 따라서 예(禮)는 그만큼 자기를 낮추고 상대를 지극히 공경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가 TV뉴스를 보고 눈을 의심하며 크게 실망한 부분이 있다.

지난 10월 31일 대통령이 내년도 예산안 국회 시정연설을 하던 날이다.

대통령이 국민의 어려운 서민경제를 살리고, 나라살림을 정상화시키고자 지혜를 짜내서 필요한 예산은 늘리고 불필요한 예산은 줄여서 고통 받고 힘들어하는 계층에게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하여 설계한 내년 국가예산에 대하여 국민에게 보고하는 시간이다.

연설을 마친 대통령이 여·야의 협조를 통해 내년 예산처리를 원만히 해결하고자 한자리요, 바쁜 시간을 쪼개서 설득과 협조하는 자리로 연설을 마치고 의원들과 일일이 악수로 반가움을 표시하는 중요한 시간인데, 야당의원 몇 사람이 앉아서 마지못해 손을 내밀거나 아예 등을 돌리고 있는 몰지각한 의원, 거기다가 보기도 민망한 문구의 피켓을 들고 상식 이하의 말을 하는 의원을 보고 이것이 민주주의 본질이라면 민주주의는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권세 유지와 개인의 이익을 위한 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국가의전(國家儀典) 서열 1위는 대통령이며, 2위가 국회의장, 3위 대법원장, 4위 헌법재판소장, 5위 국무총리다. 이후 중앙선거관리위원장 → 여당 대표 → 교섭단체 야당 대표로 이어진다. 국회의원의 공식 의전 서열은 15위다.

이는 굳이 서열을 따지지 않더라도 대통령에 대한 예의는 상식이다. 따져보면 대통령은 국민 전체 유권자가 뽑은 국가의 대표자요, 국회의원은 어느 지역의 주민들에 의해 선발된 지역 대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런저런 경우를 따지지 않더라도 남을 존중하고 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인격자였다면,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옳은 것이 아니었던가? 그렇게 예의 없는 행동하는 국회의원을 누가 인격자라고 인정하겠는가!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스스로 높다고 여기면 남이 끌어내리고, 스스로 낮다고 여기면 남들이 끌어올려 준다.(自上者人下之 自下者人上之/ 자상자인하지 자하자인상지)’라는 천금 같은 말이 큰 울림이 되어 마음에 와닿는다.

성경(聖經)에도 ‘누구든지 자기(自己)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自己)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 (마태오복음 23장, 12절)’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는 명예스럽고 자랑스러운 별칭을 소유하고 있다.

이는 지금부터 약 2,300년 전에 공자의 7대손인 공빈(孔斌)이 우리나라에 관한 이야기를 모아서 쓴 '동이열전(東夷列傳)'에서 비롯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 옛날부터 동쪽에 나라가 있으니 이를 동이(東夷)라 한다. 그 나라에 단군(檀君)이라는 훌륭한 임금이 계셨는데 아홉 부족이(九夷) 그를 받들어 임금으로 모셨다. 그 나라는 크지만 남의 나라를 업신여기지 않고, 군대는 비록 강했지만 남의 나라를 침범하지 않으며, 풍속(風俗)이 순후(淳厚)해서 길을 가는 이들이 양보하고 밥을  서로 권하였다. 남녀가 거처를 달리하여 자리를 함께하지 않았다’면서 “가히 동쪽의 예의(禮儀) 바른 군자(君子)의 나라라고 일컬을 만하다”고 높게 평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렇게 예의를 생명처럼 여겨왔던 조상들의 미풍양속이 언제부터인가 국회의원들이 국민들 눈에 완장(腕章)찬 무도한 권력가로 보였는지 알 길이 없다. 선거 때에는 머슴처럼 허리를 숙이다가 막상 되고나면 안하무인(眼下無人/ 눈 아래 사람이 없다.)되고 만다.

우리는 그러한 현장을 어렵잖게 볼 수 있다. 곧 국회청문회(國會聽聞會)나 국정감사(國政監査) 때에 이른바 ‘갑질’ 질문에서 지겹도록 보고 있다. 그럴 때면 모두들 실력과 양심과 겸손을 갖춘 인격자(人格者)가 국회의원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남송(南宋)시대 허당(虛堂)지우(智愚)의 허당록(虛堂錄)에 나오는 말로 마무리 짓고자 한다.

‘축록자불견산(逐鹿者不見山) 확금자불견인(攫金者不見人)’ 곧 ‘사슴을 쫓는 사람은 산을 보지 못하고, 돈을 움켜쥔 사람은 사람을 보지 못한다.‘ 명예나 욕심, 그리고 재물을 탐하는 사람은 인간의 도리를 지키지 못하고 바로 눈앞의 위험이나 불의(不義)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잘못을 범할 수 있으니, 보다 크고 길게 보라는 주문이다.

권력욕(權力慾)과 이욕(利慾)에 몰입돼 있거나 현혹되어 있는 사람은 그 사회의 상식과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道理)를 완전히 잊어 버리는 것을 비유할 때에도 쓰이는 말이다.

예(禮)를 잃었을 때 가정과 사회, 국가의 내부적 혼란은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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