射琴匣(사금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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射琴匣(사금갑)
  • 장상현 전 인문학 교수
  • 승인 2024.02.26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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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현 전 인문학 교수

제41편 : 射琴匣(사금갑) 거문고 상자를 (활로) 쏘아라.

 

❍글자 : 射(궁술 사/ 쏠 사)  琴(거문고 금)  匣(갑 갑/ 작은 상자)

❍출전 :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편 제2(紀異篇 第二) 사금갑(射琴匣)

24절기 두 번째인 우수(雨水)가 지나고 정월(正月)대보름까지 지났다.

이제 겨울의 덧옷을 벗고 가벼운 차림으로 바깥행동을 하며, 농촌에서는 일 년 농사를 생각하며 준비를 하고 있다.

정월 대보름은 정월(正月/1월)의 보름날을 가리키는 말로, 음력 1월 15일을 말한다. 이는 지구와 달이 거리상으로 가장 가까운 날로 다른 보름달보다 크기가 14%, 밝기는 30%가 더 밝다고 전해진다. 정월 대보름은 새해 처음 맞는 보름날로 '상원(上元)', 혹은 '오기일(烏忌日)'이라고도 한다.

이날의 풍속(風俗)놀이로는 ‘달맞이’와 ‘쥐불놀이’가 대표적이며, 전통적으로 설날보다 더 성대하게 지내기도 했다.

대보름은 전날인 음력 14일부터 행하는 여러 가지 풍속들이 많다. 원래는 설날부터 대보름까지 15일 동안 축제일이었으며, 이 시기에는 ‘빚 독촉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다정과 화목을 바탕으로 큰 축제 위주로 정초(正初)를 즐겼다.
이날에는 ‘부럼’ ‘찰밥(오곡밥)’ ‘귀밝이술’ ‘취나물’ 같은 묵은 나물 등을 먹으며 한 해의 건강과 소원을 빌기도 했다. 또한 ‘고싸움’ ‘석전놀이’ ‘쥐불놀이’ ‘연날리기’와 ‘다리 밟기’ 등 다양한 놀이를 하였는데, 이 풍속들은 오늘날에도 일부 이어져 행해지고 있다. 지역별, 마을별로 제사를 지내는 곳도 있다. 정월 대보름에는 한 해의 계획을 세웠는데, 이 과정에서 한 해의 운수를 점치기도 하였다.

정월 대보름날 찰밥이나 오곡밥을 먹는 유래(由來)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해진다.

신라 제21대 소지왕(炤知王/이름이 비처이므로 비처왕 이라고도 함)10년 戊辰日, 왕(王)이 정월 대보름날 천천정(天泉亭/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을 감사하는 마음에 하늘에 제사지내는 장소)에 행차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중서사미(衆鼠舍尾/쥐 떼들이 일렬로 꼬리를 물고 지나감)로 까마귀 한 마리와 함께 나타나서 왕에게 사람이 하는 말로 아뢰었다.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따라가 보세요.”라고 말한 후 쥐들은 총총히 사라졌다. 

그러나 왕은 제사 때문에 직접 갈 수가 없어서 경호기사(警護騎士) 한 사람으로 하여금 까마귀를 쫓아가게 하였다. 

기사(騎士)가 까마귀를 쫓아 남쪽으로 가서 피촌(避寸)이라는 마을에 이르렀는데 그 마을에서 돼지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 한참을 구경하다가 기사는 까마귀가 간 곳을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다. 까마귀를 놓친 그 기사는 당황하여 이리저리 배회하며 까마귀를 찾아 헤매던 중 바로 옆 연못 가운데서 물이 부글부글 끓는 현상과 함께 한 노인이 나타나면서 천천히 물 위를 걸어 기사에게로 다가와 말하기를..

“까마귀의 행방은 개의치 마십시오. 까마귀는 나에게 인도하여 주고 가버리면 그의 임무를 마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인은 밀봉된 종이봉투를 올리는데, 겉봉에 ‘開見二人死 不開一人死 [개견이인사 불개일인사/ (봉투를)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라고 적혀있었다.

기사는 돌아와 봉투를 왕에게 드리고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자세히 보고하였다. 

이에 왕은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 한 사람이 죽는 것이 그나마 나을 것”이라고 말하며 봉투를 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수행하던 일관(日官/기상담당관)이 말하길. “두 사람이란 서민(庶民/일반백성)을 가리키는 것이고, 한 사람이란 왕(王)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열어보십시오.”라고 왕께 아뢰었다. 

왕이 마침내 그것을 열어 보니, 그 봉투 안에 ‘사금갑(射琴匣/ 거문고 상자를 쏘아라)이라고 적혀 있었다. 제사를 마친 왕이 황급히 궁으로 돌아와 자기 침실에 있는 거문고 匣(갑/상자)을 쏘자, 거문고 갑 안에 숨어있던 중과 궁주(宮主) 두 사람이 피를 흘리며 튀어나왔다. 두 사람이 간통한 후 자기들이 왕이 되려고 왕을 죽이기 위해 침대 옆 거문고 상자 안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즉각 처형당했다. 

다른 역사서에 ‘중은 묘심랑(妙心郞)으로 천주사(天柱寺) 분수승(焚修僧/부처 앞에 향을 피우며 불교의식을 집전하는 승려)이라고 하였고, 궁주(宮主)는 불공드리러 온 선혜왕비(소지왕의 왕비)로 이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사통(私通)후 모반을 계획하고 왕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하려고 거문고 상자에 숨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신라(新羅)에서는 해마다 정월 상해일(上亥日/첫번째 돼지날), 상자일(上子日/첫번째 쥐날) · 상오일(上午日/첫번째 말날)에는 모든 일을 조심하고 감히 움직이지 않았으며 특히 15일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을 지어 까마귀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신라에서는 이날들을 ‘모든 일을 특별히 조심하고 꺼린다.’는 뜻의 달도(怛忉)라 불렀으며, 오늘날 한국의 정월 대보름 절식(節食)의 하나로서 찰밥(약밥)이나 오곡밥을 먹는 풍속의 유래가 되었다. 

또한 노인이 나타나 편지를 전해주었다는 연못을 서출지(書出池/글이 나온 연못)라고 부르고, 지금까지도 많은 경주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장소(저수지)가 되었다.

소지왕은 백제(百濟)와 가야(伽倻) 등 주변나라들과 화친(和親)하므로 국가의 안정을 꾀하였고, 나라의 정치적 혼란을 안정시키는 등 정치가로서 매우 탁월한 능력을 발한 현명한 군주였다.

이 설화는 아마 왕권 강화를 위한 왕의 정당성을 꾀하고자 만들어진 설화로 생각되나 정치적으로는 시사(示唆)하는 바가 크다.

왕권이 강화되어야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의 삶이 나아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독재자가 아닌 올바르게 행하는 군주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도 국가 안정과 발전에 도움이 될 때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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