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래불사춘 (春來不似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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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래불사춘 (春來不似春)
  • 장상현 전 인문학 교수
  • 승인 2024.03.25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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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현 전 인문학 교수
장상현 전 인문학 교수

제43편: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봄은 왔지만 봄 같지 않다.

❍글자 : 春(봄 춘)  來(올 래)  不(아니 불)  似(같을 사/ 닮다)  

❍출처 :  당(唐)나라 동방규(東方虯) 〈소군원(昭君怨)〉 삼수(三首)

❍비유 : 세상이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변화를 체감하지 못하는 상황을 표현

중국의 왕조(王朝)는 전설상의 부족국가인 요(堯)임금으로부터 청(靑)나라에 이르기까지 가장 경계하고 걱정하고 있던 분야가 북방민족과의 평화문제였다.

이른바 흉노족(匈奴族)이라고 말하는 지금의 몽골초원 유목민들의 중국 침략을 막아야 하는 국방문제가 역대 황제들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만리장성까지 쌓아서 북방의 침입을 막으려는 왕조의 노력이 지금까지 그 흔적으로 남아있다.

흉노족은 중국의 북방지역을 자주 침범해서 사람을 납치하고 가축과 재물을 끌고 가는 등 약탈을 일삼았다.

이 고사성어가 생긴 시대는 한(漢)나라 11대 황제인 원제(元帝) 때의 이야기며 왕소군(王昭君)이란 한 여인의 정략결혼에 얽힌 슬픈 이야기로 엮어진다.

한(漢) 원제(元帝)는 전국에 후궁(後宮)을 모집한다는 조서를 내렸는데, 전국 각지에서 선발되어 입궁한 궁녀들의 수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이때 시골에 살던 왕장(王嬙)도 미모와 재주로 18세의 나이에 후궁으로 선발되었다.

황제는 수천 명에 이르는 궁녀들의 신상을 일일이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연수(毛延壽)라는 화공에게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려 바치게 했다.

이에 궁녀들 중 부귀(富貴)한 집안 출신이나 수도 장안에 후원자가 있는 궁녀들은 화공에게 자신의 모습을 예쁘게 그려 달라고 뇌물(賂物)을 바쳤으나, 왕장은 집안이 가난하고 달리 아는 사람도 없는 데다 자신의 용모를 황제에게 속일 마음이 없었으므로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모연수는 뇌물을 바치지 않은 왕장의 용모를 평범하게 그렸고, 없는 점(點)까지 넣어서 못생긴 얼굴로 보이도록 그려 바쳤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왕장은 입궁한지 5년이 지나도록 황제와의 잠자리는커녕 얼굴조차도 볼 수가 없었다.

한편 흉노족의 호한야(呼韓邪)라는 선우(單于/ 흉노족 왕의 칭호)가 원제를 알현하기 위해 장안으로 왔다. 호한야는 모피와 준마 등 많은 공물을 가지고 와서 원제에게 공손하게 문안을 올렸다. 이에 크게 기뻐한 원제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호한야 선우를 환대했다. 

호한야 선우는 원제에게 황제의 사위가 되고 싶다고 청하였다. 원제는 그의 청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공주 한 명을 시집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황제는 자기 딸이 오랑캐 땅으로 시집가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후궁 한 사람을 공주라고 속여 오랑캐 땅으로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후궁들의 초상화를 가져오게 하여 못생긴 후궁을 보내기로 하였는데, 이에 선발된 후궁이 왕장이었다.

황제는 결혼식 전에 먼저 호한야에게 한나라 황실의 위엄을 과시하고 싶어 자기 후궁 중에서 아직 총애를 받지 못한 미녀들을 불러와 연회를 베풀었다. 궁녀들이 들어오자 호한야는 다채로운 모습에 한참 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자기 처(妻)가 될 왕장을 보고 그 미모에 완전히 넋을 잃었고 연회를 즐긴 후 그녀와 혼인식을 올리고 곧바로 자기 나라로 함께 돌아가기로 결정 되었다.

한편 원제는 공주 대신 가야 할 후궁의 미모가 워낙 출중하여 그 후궁에게 그만 반하고 말았다. 그러나 황제로서 한번 내린 결정을 다시 번복할 수도 없었다.
원제는 연회가 끝난 후 급히 돌아가서 궁녀들의 초상화를 다시 대조해 보았다. 왕장의 그림이 본래의 모습과는 너무 다른 것을 발견한 원제는 황제를 속인 모연수(毛延壽)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하도록 명령하였다.

모연수는 결국 황제를 기만한 죄로 참수되었고. 원제는 호한야에게 혼수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 3일만 기다려 달라고 속이고는 조용히 왕소군을 미앙궁(未央宮)으로 불러 사흘 밤 사흘 낮을 함께 보냈다. 3일 후, 왕소군은 흉노족 차림으로 단장을 하고 미앙궁에서 원제에게 작별을 고하였으며, 원제는 그녀에게 소군(昭君)이라는 칭호를 내려 왕장은 왕소군(王昭君)이라는 후궁에게 주어지는 별호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

왕소군은 결혼 후 흉노 땅에서 그곳 여인들에게 길쌈하는 방법 등을 가르쳤고, 한나라의 문화를 전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 유지를 위해 노력하여, 그 후 80여 년 동안 흉노와 한나라의 접전은 없었다고 한다.

왕소군이 죽은 후 그 시신은 대흑하(大黑河) 남쪽 기슭에 묻혔다. 왕소군의 묘는 내몽고 후허하오터(呼和浩特) 남쪽 9킬로미터 지점에 있다. 그런데 이 무덤이 가을이 되어 북방의 초목이 모두 누렇게 시들어도 오직 왕소군 무덤의 풀만은 푸름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 무덤을 ‘청총(靑塚/ 푸른 무덤)’이라 했는데 지금까지 남아있다.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 오랑캐 땅엔 꽃도 풀도 없어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自然衣帶緩(자연의대완) / 옷에 맨 허리끈이 저절로 느슨해지니
非是爲腰身(비시위요신) / 가느다란 허리 몸매를 위함은 아니라오

이 시(詩)는 왕소군의 당시 상황을 표현한 시(詩)로 당(唐)나라 시인 동방규(東方虯)의 시(詩) 소군원(昭君怨)에 실려 전해진다.

춘분(春分)이 지난 대한민국!!

남쪽지방으로의 봄소식이 연일 TV 화면과 신문 지상을 가득 메우고 있다. 화사한 봄꽃과 여인네들의 복장이 봄이 왔음을 실감케 한다.

헌데 우리 정치지도자들의 마음의 봄은 언제 오려나!

불신(不信)과 분열(分裂), 비방(誹謗)과 폄하(貶下), 기만(欺瞞)과 허언(虛言),부정(不正)과 부패(腐敗) 등 나라 어지러워 봄 같지 않다.

4월 10일 이후에는 진정한 봄을 느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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